한낮의 발길 드문 선미촌 거리를 걸었다.
올해 1월 이 골목 한가운데 자리 잡은 예술가 서점 ‘물결서사’로 가기 위해서다. 물결서사는 전주에 뿌리를 둔 7명의 예술가 ‘물왕멀팀’이 공동 운영하는 동네 작은 서점이다. 물왕멀팀은 고형숙(한국화가), 김성혁(성악가), 민경박(영상작가), 서완호·최은우(서양화가), 임주아(시인), 장근범(사진가) 작가로 구성돼있다.
성매매 집결지라는 거리감과 거부감을 무릅쓰고 골목 깊숙한 곳까지 물어물어 찾아 들어오는 손님들 마음 한 곳에는 서점을 운영하는 예술가들과 선미촌의 변화되는 모습을 응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그들은 느낀다.
“우연히 지나가면서 들르는 곳이 아니라 마음먹고 찾아와야 하는 곳이라 손님 한 분 한 분의 방문이 반갑고 감사하죠.”
물결서사는 지난 8월 15일 저녁 박준 시인 낭독회를 열기 전 손님들에게 개별적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오는 길에 붉은 빛이 보이더라도 걸음을 주저하지 마세요. 예술가들의 작은 용기로부터 시작된 물결서사의 마음이 여러분에게 닿길 바랍니다’
해질 때쯤이면 하나 둘 불을 켜는 성매매업소 모습에 놀라 돌아서지 말고, 있는 그대로 선미촌을 바라보며 서점까지 무사히 도착해달란 의미였다.
물왕멀팀은 “전주에 살면서 한 번도 선미촌 근처에 오지 못했다는 20대 젊은 손님들이 저 멀리서부터 성큼성큼 다가와 서점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알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고 말했다. 또한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닫힌 마음을 여는 일’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물결서사가 그 마음을 여는 일에 작은 힘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들의 품은 용기와 실험은 다양한 활동으로 펼쳐졌다. 올해 3월부터 페이스북 페이지와 인스타그램 등 SNS 채널을 통해 시·사진·그림·영상 등 꾸준히 개인 창작물을 발표해왔다. “발표지면이 없으면 우리가 직접 만든다”는 발상으로 시작된 이 연재는 8월까지 이어져 총 112개에 달하는 콘텐츠가 게재됐다. 이들은 당초 물결서사 매거진을 만들기 위해 아이디어를 생각했으며 연말에 크라운드 펀딩을 받아 본격적으로 출간물 발간에 나설 계획이다.
젊은 예술가들의 무대도 마련됐다. 지난 6월 물왕멀 주민 조현상 성악가의 데뷔콘서트, 광주 미술작가와 ‘지역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을 주제로 연 교류워크숍, 전주시 문화적재생사업단 인디와 함께 8월 14일부터 20일까지 진행한 ‘물결휴가예술주간인디’와 서노송동 야시장 등으로 선미촌의 모습을 새롭게 바꿔놓고 있다.
서점으로 물결서사는 어떤 곳일까. 현재 물결서사는 세 곳의 책공간을 두고 있다. 첫 번째는 정문을 열면 바로 눈앞에 띄는 문학·음악·영화·사진·그림책들. 작가들이 직접 선별한 책들이다. 테이블이 있는 곳에도 예술품과 함께 책들이 눈에 들어온다. 물왕멀팀은 두 달에 한 번씩 주제를 정해 큐레이션을 꾸민다. 안쪽에는 기증받은 책들로 이뤄진 ‘공유서점’이 있다. 1000~4000원의 싼값에 책을 살 수 있고, 동네 주민은 맘껏 빌려 갈 수 있다.
판매하는 서적뿐만 아니라 공유서점 역시 많은 호평을 받고 있다. 물왕멀팀은 “먼 동네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책을 기증하는 아주머니가 있는가 하면, 친구들과 돌려 읽기 위해 책을 고르는 주민 할아버지 등 단골손님이 늘어 기쁘다”고 말했다. 이어 그들은 “책을 많이 팔아서 책을 많이 들여놓고 더 폭넓은 목록을 선보이고 싶다”는 소망과 “헌책이 있는 공유책방에도 큐레이션을 도입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책방에 오는 주민들과 시민들의 말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물왕멀에서 서노송동으로, 선미촌으로 불린 이곳을 보고 걸으며 그 순간의 소중함들을 기록한다는 것.
임주아 물결서사 대표는 ”앞으로 주민들과 시민들이 즐겁게 찾아올 수 있는 문화공간과 예술가들이 오래 상주할 수 있는 안정적인 공간이 생겨 선미촌이 서노송예술촌으로 무사히 안착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난 뒤 골목의 끝에서 물결서사는 반짝이고 있었다. 이 골목으로 책을 읽으러 오는 사람들의 걸음을 생각했다.
물결서사
<주소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물왕멀 2길 9-6 영업시간 : 매일 오전 11시~오후 6시, 수요일 휴무 인스타그램 : http://www.instagram/mull296>
책방지기가 추천하는 책
<자영업자/출판사 사월의 눈/작가 김지연>
서학동사진관을 운영하는 김지연 사진가님은 2000년대 초반부터 ‘정미소’(2002), ‘나는 이발소에 간다’(2004), ‘근대화 상회‘(2010), ‘낡은 방’(2012) 및 ‘삼천원의 식사’(2014) 등으로 지역 문화 및 소시민들의 삶을 기록하셨어요. 2016년부터 2018년 상반기까지 전주와 서울, 광주의 자영업자들을 만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중식당 주인, 자전적 책을 쓰고 싶어하시는 수선집 어르신, 꽃이 좋아 꽃가게 운영이 행복하다는 꽃집주인 등 다양한 자영업자들이 가진 특수성과 보편성이 눈에 띱니다. 자영업자들의 일상 속에서 특별함이 담겨있는 이번 책을 소개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