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왜 이래?’
‘명절에 왜 이래?’
  • 박인선
  • 승인 2019.09.15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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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견 作 우리동네 축일(전주한옥마을의 명절분위기를 형상화한 작품)

 연휴가 시작되자마자 모싯잎 송편 가루를 빻아 오라는 부탁을 한다. 송편 몇 조각 사 먹으면 될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방앗간을 가기가 멋쩍기만 했다. 가끔씩 아내와 같이 가보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말했다. ‘명절에 왜 이래?’ 혼잣말로 불퉁거려 봤다. 그래 보았자 돌아올 소리가 뻔하다. 옛날 같았으면 어림없는 소리였다. 사내가 부엌에 드나들면 큰일 날 것처럼.  

 방앗간에 들어섰다. 요란스러울 만큼 바쁘게 돌아가는 기계 소리도 멈춰있고 한가롭기만 했다. 순번을 기다릴 것도 없었다. 문화가 바뀌었다고 해야 할지. 방앗간도 예전 같지 않다는 주인의 푸념 섞인 답변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연휴 명절을 해외에서 보내려는 공항의 출국 모습이 북새통이라고 한다. 여행 중에 호텔이나 리조트에서 제사를 올리는 풍경도 뉴스거리가 되었다.  

 세상이 변하는데 명절 풍습도 바뀌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송편 가루를 빻아서 가져가면 반죽하는 것도 온전히 내 몫이다. 아내는 가끔 대학시절 함께 했던 미술시간의 도자기 흙 반죽을 떠올린다. 추억을 되살리면서 칭찬이 곁들여지니 체면은 온데간데 없다. 그러면서도 싫지 않으니 이제는 나이 탓이다 싶을 때도 있다. 모두가 오순도순 모여 앉아 송편을 빚는 모습은 우리만의 보기 좋은 풍경이었다.

 어린 시절엔 일 년 중에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었던 것은 명절이었다. 여름을 지나면서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새 옷을 입어도 촌티는 벗을 수 없었다. 코흘리개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만으로도 풍요로움이었다. 힘들고 바쁜 와중에서도 어머니는 흐뭇한 날이었다. 자식들의 먹는 것이 제일 보기 좋다는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다녀온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성묘길은 아이들에게는 벅차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인 줄 알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당연한 것이었다. 명절날의 중요한 행사는 풍류놀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농악꾼들이 길놀이와 마당놀이를 하면서 집집마다 돌아다녔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모처럼 안부를 전하고 한마음이 된다.

 풍물놀이는 동네 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었다. 텔레비전조차도 흔치 않았던 시절에는 볼거리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줄지어 어깨춤을 덩실거렸다. 놀이꾼들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농악 장단도 익혀졌다. 잠시라도 쉴 때는 꽹과리를 흉내 내어 쳐보았다. 풍류, 양산도, 휘모리 등 장단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그런 경험은 대학에서 농악반을 만들고 상쇠를 맡아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귀성 차량행렬들을 보면 귀향길은 고행길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시대가 변했다고 하지만 자신의 뿌리가 있는 고향은 자신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있는 어머니의 품 안과 같다. 힘들고 애처로운 삶조차도 고향에서는 녹아난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만을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른다.

 명절은 우리의 모습을 투영해 볼 수 있는 거울과 같다. 분화되어 있는 가족들과의 관계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다. 남자와 여자가 할 일이 따로 일수 없다. 모싯잎 송편을 먹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줄 수 있어서 서로를 이해하고 챙겨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지역 간, 세대 간에도 심화된 갈등을 풀어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번 명절은 ‘화합’이라는 화두가 절실해 보였다.

 

 글 = 박인선(정크아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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