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⑪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⑪
  • 김재춘
  • 승인 2019.10.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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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승전(勝戰)장군 신각 목 베

 3일 선조일행이 개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향했다. 이날 황해도(黃海道) 금천(金川)을 지났고, 4일 평산(平山), 5일 봉산(鳳山), 6일 황주(黃州)를 지나 7일 평안도(平安道)로 들어가 중화(中和)를 거쳐 대동강을 건넜고 이니라 중으로 평양에 들어갔다.

 황주에서부터는 평안감사 송언신(宋言愼)이 기병 3천을 거느리고 나와 길을 안내하여 비로소 군왕의 위엄이 되찾아졌다.

 평양성은 둘레가 2만8천8백자로 한성의 5만9천5백자, 높이 40자에 비해 규모는 작으나 성앞에 대동강을 끼고 있고 북성(北城), 중성(中城), 외성(外城) 등이 있어 요새를 이루고 군사도 1만여명에 징집이 가능한 장정도 수천명이 있었다. 일본군과 수성전(守成戰)을 펴볼만 했다.

 한편 바다건너 풍신수길은 전방사령부가 설치된 구슈 나고야로 향하던중 4월23일 부산진과 동래 함락 보고를, 나고야에 도착한 26일에는 김새성 함락보고를 받았다. 한성함락 보고는 5월16일에 받았다.

 한성에는 선봉부대를 뒤따라 모이길성(毛利吉成)의 제4번대 주력이 입성, 성내외에 6만여명의 일본군이 주둔했다.

 제5번대 이하 일본군 주력도 계속해서 부산에 상륙, 예정된 점령지역으로 진공했다. 일본군의 부대별 예정 점령지역은 다음과 같았다.

 제1번대 평안도, 제2번대 함경도, 제3번대 황해도, 제4번대 강원도, 제5번대 충청도, 제6번대 전라도, 제7번대 경상도, 총사령관 우희다수가의 제8번대가 한성과 경기도를 맡았다. 제8번대와 우계수승(羽癸秀勝)의 제9번대는 쓰시마와 이키도에 예비대로 배치되었으나 조선진군이 뜻밖의 쾌조를 보이자 계획을 변경, 전군을 상륙시켰다. 제9번대는 후방치안과 예비대로 배치됐다.

 이로써 조선침공군 15만8천7백명 전병력이 조선에 투입된 것이다.

 풍신수길은 점령지역에서 현물세를 거두는 등 군정을 펴게하는 한편, 부산, 동래, 김해 등 주요 12개 본성과 6개지성을 일본식 왜성(倭城)으로 축성케 하는 장기 점령통치 계획도 착수했다.

 그러나 이무렵, 승리의 여신은 점차 일본침공군을 버리고 조선에 미소를 보내기 시작했다.

 5월7일과 8일 조선수군 이순신함대가 남해 옥포(玉浦)와 적진포(赤珍浦)에서 일본 수군을 잇따라 격파, 무적의 위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육지내에서도 조선군에 작은 승리가 안겨졌다.

 임진강 전투가 벌어진 18일 직전(일자 미상), 한강 저지작전때의 부원수 신각이 암경도 남병사(南兵使) 李혼의 군사와 함께 한성과 철원사이 양주(揚州) 가까운 해유령(蟹踰領)에서 일본군 70여명을 전멸시켰다. 신각은 한강 저지선에서 도원수 김명원이 달아나 싸우지도 못하고 퇴각, 한성에서 유도대장 이양원과 같이 양주 산속으로 들어가다가 이혼의 군사를 만났다. 때마침 일본군 소부대가 부변마을을 약탁하고 다니는 것을 알고 해유령에 잠복하고 있다가 이같은 승리를 거둔것이다. 신각은 조정에 승전보를 띄우고 이양원과 함께 연천(漣川)부근의 임진강변 대탄(大灘)을 키키고 있었다.

 그런데 피난조정에서 달려온 선전관이 왕명이라면서 신각의 목을 베었다. 김명원이 달아나면서 조정에 장계를 띄워 "신각이 명령을 듣지 않았다"고 한강저지작전 실패의 책임을 신각에 뒤집어 씌웠고, 조정은 그대로 믿고 그를 베기로 했던 것이다. 목을 베어 오라는 명령을 받은 선전관이 떠난뒤 해유령 승전보가 올라오자 목을 베지 말라는 선전관을 뒤따라 보냈으나 신각의 목이 떨어진 뒤에야 도착했다.

 5월17일과 18일 임진강변 문산(汶山)과 장단(長端)사이 임진 나룻터에서 조선군 1만명이 일본군 1만2천명과 맞붙어 청주전투 이래 최대규모의 격전을 벌였으나 조선군의 대패로 끝났다.

 도원수 김명원이 임진강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신임 부원수 이빈 조방장 유극량(劉克良) 방어사 申할 그리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제도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가 된 한응인과 함께 강북쪽에 군사를 포진하고 강을 건널수 있는 배들은 모조리 거두어 들였다.

 앞서 10일. 함경도로 진격하기 위해 한성을 출발, 파주를 거쳐 임진강에 도착한 가등청정군이 강을 건너지 못한채 3일을 보냈다. 그때 한성에 머물고 있던 소서행장이 조선과의 강화교섭을 위해 군사를 뒤로 물려줄것을 요청해 왔고, 가등청정이 이에 응해 강변의 군막들을 태우고 소수의 감시병만 남긴채 파주로 철군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2월20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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