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으로 묻힌 군산 출신 작가 이근영
분단으로 묻힌 군산 출신 작가 이근영
  • 이복웅
  • 승인 2019.09.08 15: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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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북 작가에 대한 작품 연구는 이데올로기의 선입견에 의해 접근이 소홀히 된 체 일방적인 문학사에 의해서 오류 또는 유추적 방향으로 잘못 정리됐었다. 그러나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분야별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탈 이데올로기 현상이 나타나면서 민족 화합이란 대명제를 전제로 할 때 이곳 군산 출신 작가 이근영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며 왜곡되어 사장되어 온 한 문학인을 복원한다는 점에서 다소나마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근영은 1909년 5월12일 전북 군산시 임피면 읍내리에서 경주이씨 집안인 아버지 이집찬과 어머니 고성녀 사이에서 2남 1녀의 막내로 빈농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익산 함라초등학교와 서울에 있는 민족학교인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이근영은 1934년 3월11일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다. 그가 어떠한 방법으로 문학수업을 했는지는 그리 알려진 바가 없다. 이근영은 1935년 서울에서 고하 송진우 선생 주례로 강릉이 고향인 숙명여전 출신인 세 살 아래였던 소학교 선생 김창렬(1912년생)과 결혼, 슬하에 6남매를 두었다.

 1935년 <신가정>10월호에 「금송아지」로 문단에 데뷔한 그는 8.15 해방 전에는 주로 일제 침탈로 황폐화되어 가는 농촌사회를 배경으로 한 농민들의 애환과 착취과정을 집중적으로 썼으며 가난으로 인하여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작인들의 내면세계와 강직한 사람이 겪어야 했던 심리적 갈등에 비중을 두고 작품을 썼다. 이근영이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1940년 8월 폐간 때까지 근무한다 폐간 후 <춘추>사 편집인으로 활동했으며 서울에서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 교직사회와 실직생활을 소재로 사회부조리를 다루는 「과자 상자」, 「탐구일일」 그리고 「적임자」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교사나 그리고 실직자들의 생활상은 실직 후 직업의 전전이나 그 무렵 자신의 생활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싶다.

해방 후 그는 그의 부인 김창렬이 근무하던 함라초등학교 관사에서 1년여 살다 서울로 올라가 조선통신, 서울신문에 잠시 근무하게 된다. 이근영은 이 무렵 조선문학가동맹 농민위원회 사무장과 서울지부 총무부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이근영의 월북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대체로 1948년 말에서 1949년 단독정부 수립 사이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의 조카 이규일(작고)씨에 따르면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로 기억하고 있어 월북시기를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으나 대체로 6·25전쟁 전후, 1950년 겨울 또는 1951년 1월이 아니겠느냐는 증언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탁류 속을 가는 박교수」가 <신천지>에서 1948년 6월에 발행되고 「제3노예」가 <아문각>에서 1949년에 소설집으로 발간되었음을 고려해 볼 때 1949년말 쯤 월북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이근영의 월북 시기는 6.25전후가 추측되며 여기서 그가 자진 월북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할머니댁에 있던 큰딸 규원을 제외하고 가족 모두를 데리고 월북했다는 점과 월북 후 조선해방일보 사장으로 있으면서 1953년 휴전 협정때 북한 기자단 단장으로 나왔다는 점(조카 이규일(작고)씨의 증언)을 들 수가 있다.

이근영의 해방전후와 월북후의 작품활동을 살펴보면 「금송아지」, 「과자 상자」, 「농우」, 「말하는 벙어리」, 「제3노예」, 「당산제」, 「이발사」, 「탐구일일」, 「최고집 선생」, 「고독의 변」, 「고향 사람들」, 「흙의 풍속」, 「장날」, 「고구마」, 「안노인」, 「탁류속을 가는 박교수」 등이 있으며 월북후 단편 「고향」, 「그들은 굴하지 않았다」 등을 발표. 1953년에는 장편 「청천강」을 1956년에는 중편 「첫수확」을 발표했다.

또한 해방전의 작품「농우」, 「말하는 벙어리」, 「최고집 선생」, 「소년」을 함께 묶어 작품집으로 <첫수확>을 냈다. 1966년 장편 「별이 빛 나는 곳」을 발표 한 바 있는 이근영은 북한에서 농민작가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1960-1970에는 <우신창작실>에 소속되어 80년대 초에도 장편 「어머니와 아들」을 썼다(전흥남, 이근영론, 1982) 또한 언어학 박사로 사회과학원에서 발간한 「조선말 사전」 책임 감수자로 널리 알려저 있으며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창작 활동에 전념하고 있었으나 전언에 의하면 1985년 무렵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이념체제에 의하여 매몰 되었던 분단시대를 넘어 재조명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일깨워 주는 일이라 생각한다.

 이복웅<사)군산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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