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⑨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⑨
  • 김재춘
  • 승인 2019.09.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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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닥치면 충절 간데 없어 관료들 위선(僞善) 드러나

가등청정이 배와 뗏목 등으로 한강을 건너 북쪽 강변에 진을 치고 한성으로 접근했다.

 5월3일 소서행장의 1번대가 동대문(흥인문興仁門)에 도달했다. 성문은 굳게 잠겼고 성안은 죽은듯이 조용했다. 같은날 가등청정의 2번대는 남대문(숭례문崇禮門)에 도착했다. 상문은 활짝 열렸으나 성안은 적막이 감돌았다.

 틀림없이 복병이 있을 것으로 알고 척후를 보내 수색 했으나 성안은 사람하나 없이 텅비어 있었다.

 양반도 백성도 모두가 난을 피해 사라져 버렸고 군사는 물론 없었다. 남아서 도성을 지키라는 대명을 받은 유도대장 이양원은 한강저지선이 붕괴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양주(楊州)로 달아나 버렸으며 7천여 군사들도 모두 흩어져 버렸던 것이다. 김명원이 도망가자 그를 따르지 않고 한성으로 온 부원수 신각은 이양원을 따라갔다.

 일본군은 이날 한성(漢城)을 무혈 점령했다.

 흑전장정의 3번대도 뒤따라 입성했다.

 경복궁을 비롯 대궐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이미 불타 한줌재가 되어 있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건국하고 한양을 국도로 정한뒤 2백년 조선의 심장 수도 한성이 미개한 섬나라라 멸시해 온 일본군에 이렇듯 어이없이 짓밟힌 것이다.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한지 스무날, 흡사 무인지경을 다름질치듯 질주하여 온 것이다.

 그 무렵, 부산에서 한양까지 1천1백리(453KM)길은 하루 백리를 걸어 열하루를 잡았었다. 도처의 읍성(邑城)들을 들이치며 북상한 대군의 한양입성이 평소 생활일정보다 배의 시일밖에 더 걸리지 않았으니 그들의 전진속도가 얼마나 빠른 것이었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이는 곧 조선군의 저항이 거의 없었던 것이나 다름 없었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들은 하루 평균 50리씩 북상한 것이다.

 그로부터 358년뒤 1950년 6.25전쟁때 낙동강까지 밀렸던 남쪽의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이 궤멸상태에 빠진 북쪽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인민군들의 사실상의 무저항 상태에서 9월15일 반격에 나서 30일 서울에 진입할때까지 대구기점 305KM를 15일이 걸렸다. 하루 평균 23KM 60리씩 전진했다.

 군군및 UN군은 차량행군이었고 일본군은 도보행군이었다.

 조선왕조는 유교를 국교로 했고 국가 지도원리로 했다. 유교정신은 군신간의 의리(군신유의君臣有義)와 임금 즉 나라에의 충성(위국충절爲國忠節)을 생명으로 했다. 유학은 관료들의 필수학문이었다.

 조정에는 군왕에 대한 충성, 明에 대한 사대(事大), 학문에 대한 자만에 넘친 관료들로 충만해 있는 것 같았다. 칼날앞에 목이 떨어질지언정 입과 붓으로 할말은 다 하는 오기(傲氣)가 골수에 배었고 물에 빠져 물먹고 죽으면 죽었지 개발헤엄은 칠수 없었던게 조선선비들의 자존심이었다.

 송상현과 정말 그리고 문경의 신길원 들이 그렇게 죽었다. 7년전쟁이 계속되면서 이순신이 그랬고 숱한 재야의 의병장들이 그랬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현직에 있던 조정 관료들의 대부분은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평소 입과 붓으로 말하던 충성이 얼마나 위선에 찬 것이었는가를 그대로 드러냈다.

 유교 그 자체가 현실과 실리를 외면하는 명분론이고 도덕론이었으며 이상주의였기 때문에 결국 이상과 현실사이 이중구조속의 위선적 인물들을 양산해 냈던 것 같다.

 일본군 침공이라는 냉혹한 현실에 부딪히자 조정 관료들의 태반이 평소의 위국충절은 간데없고, 성을 버리고 백성들을 버린채 일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아 달아나는데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이때 망할뻔 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2월12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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