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④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④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9.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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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 경상도 전역 10일만에 석권

 13일 밤, 부산진성은 폭풍전야의 무거운 적막이 감돌았다.

 첨사 정발(鄭撥)이 좌도 수군사령관인 수사 박홍(朴泓)에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인 침공군에 야습을 감행하자고 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돌아와 성을 지키며 밤을 지샜다.

 14일 아침 6시쯤 짙게 깔린 아침안개 사이로 우암동(牛巖洞)쪽에서 적군이 몰려오는게 보였다. 곧이어 서문쪽 높은 산에서 조총소리가 콩 볶듯 터져 나왔다. 총탄이 비오듯 쏟아지고 나면 뒤이어 화살이 날아왔다. 총수가 총을 쏜뒤 화약을 재는 동안에는 활잡이(弓手)가 나타나서 활을 쏘는 식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7년전쟁 첫 전투는 이렇게 시작됐다.

 난생 처음 듣는 총소리에 조선병사들이 혼비백산했으나 정발의 독려로 점차 냉정을 되찾아 힘껏 싸웠다.

 3시간의 사투가 벌어졌다.

 성의 북쪽이 무너지면서 적군이 봇물터지듯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정발이 총탄을 맞고 죽었다. 곧이어 성안에서 도살이 시작됐다. 일본군은 성안의 사람을 군, 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해했다. 1천여명이 몰살된 것으로 전해졌다.

 곧바로 서생포(西生浦:동래 소하 구평리)와 대대포진(多大浦鎭)으로 달겨 붙었다. 다대포 첨사 윤흥신(尹興信)과 두 진鎭의 군사 전원이 전사하고 성은 유린됐다.

 15일 아침 6시, 제1번대 주력이 부산진을 떠나 동래(東萊)로 향했다. 8시부터 성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패목(牌木)에 글을써 성안에 보냈다.

 "싸우겠다면 싸울것이로되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라(전칙전모戰則戰牟 불전칙가도不戰則假道)"

 송상현은 단호했다.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전사이戰死易 가도난假道難)"

 적의 총 격 두시간만에 성이 무너졌다.

 아비규환의 살륙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송상현이 전투복위에 조복(朝服임금을 뵐때 입는 관복)과 조모(朝暮)를 쓰고 임금이 있는 북쪽에 두번 절하고 고향의 아버징에게 보대는 詩 한 수를 부채에 써 남겼다.

 "고립된 성을 적군이 달무리처럼 에워싸고 鎭을 구할 길이 없사옵니다. 군신간의 의義가 중重하여 여기서 죽게되니 아버짐의 크신 은혜를 ㅅ홀히 하는 불효를 용서하소서(고성월운孤城月暈 대진불구大鎭不求 군신의중群臣義重 부자은경父子恩經)"

 두달전 사신으로 와 송상현의 인품을 알았던 대마도의 평조익이 그를 알아보고 몸을 피하라 했으나 오히려 일본군을 크게 꾸짖었다.

 "우리가 너희에 잘못한게 없는데 너희가 이같이 하는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죽고 죽이는 전쟁마당에서 도의론이 통할리가 없었다. 일본군의 칼날에 그는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응원차 달려와 함께 싸운 양산군수 조영규(趙英珪)도 죽었다.

 조선에 사신으로 온바 있었고 이때 종군승(僧)으로 따라온 천형(天荊)이 남긴 서정기(西征記)에 이날 동래성의 참상이 이렇게 적혀 있다.

 ’목을 벤게(斬首) 3천여, 포로가 5백여’

 송상현의 의연한 죽음에 감복한 일본군이 그의 시체를 성밖 북쪽산 밤나무 숲에 묻어주고 묘표(墓標)를 세웠다.

 ’조선충신송공상현지묘 朝鮮忠臣宋公象賢之墓’

 그의 처자와 첩 이양녀(李良女)가 포로로 잡혀 일본까지 끌려 갔다가 강화교섭 때 송환되어 왔다.

 울산군수 李언함이 같이 싸우다 포로가 되었다. 소서행장이 그에 편지를 주어 석방했다. 공조판서(工曹判書) 이덕형(李德馨)을 만나 강화를 의논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는 석방이 탈로날까 두려워 편지를 찢고 사실을 숨겼으나 뒷날 소서행장의 두번째 편지로 들통이 났다.

 진주(晋州)에 본영을 둔 경상도 우병영(右兵營)의 육군사령관인 우병사는 조대곤(曺大坤)이었다. 늙고 병들었다해서 김성일(金誠一)로 교체, 부임중에 전쟁이 터졌다. 조대곤은 김성일이 도착하자 인계고 뭐고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김성일은 또 오기를 부려 조정에 장계를 띄웠다.

 "적선은 4백척에 불과하고 군사 수십명씩을 태웠으니 모두 1만명을 넘지 못한다"

 별거 아니라는 보고였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2월6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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