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없는 나라’가 다시 떠오르는 이유
‘나라 없는 나라’가 다시 떠오르는 이유
  • 무울 송일섭
  • 승인 2019.08.29 14: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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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 없는 나라’는 이광재가 쓴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불후의 명작 <혼불>을 쓴 최명희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혼불문학상 제5회 수상작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동학농민혁명 시작부터 전봉준 장군 체포까지의 과정을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나라 없는’ 당대의 현실을 잘 포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우리에게는 ‘고종’이라는 임금과 ‘조선’이라는 나라는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나라’가 아니었다.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은 우리의 주권을 빼앗고, 강산을 유린했다. 백성들은 길을 잃고 표류했고, 집권층은 어떤 방향도 설정하지 못했다. 마치 오랜 잔병치레 끝에 죽음을 앞둔 환자처럼 무력했다. 그 암울한 시대에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들고 새로운 희망을 설계했던 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이었다. 그러나 근대식 무기를 갖춘 일본의 개입으로 동학농민군은 처참하게 패했다. 이후 조선은 참담하게 무너졌고 백성들에게는 풍전등화 같은 위태로움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백성들은 그 어디에서도 ‘나라’를 이야기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이런 실패의 역사 속에서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찬란했던 문화를 빼앗겼고, 더불어 사는 대동의 넉넉함마저 잃어버렸다. 그 후 일본은 우리에게 여전히 무도한 가해자로 남아 있다. 동방의 작은 나라가 아직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사실 또한 일본통치가 우리에게 남긴 상처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까지 진솔한 반성과 사과를 한 적이 없고, 걸핏하면 우리를 겁박하고 있다.

 

 최근 한일관계가 급속하게 악화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자에 대한 우리 대법원의 배상 판결 때문이다. 아베는 ‘한국은 국가 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며 우리를 맹비난했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 간의 약속으로 해결된 문제가 아니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지만, 개별 개인에 대한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은 국가 간의 약속으로 소멸되지 않는다는 점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국가 간의 약속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 그들은 구한말 우리와 한 여러 조약들을 한 번 도 제대로 지킨 적이 없었다. 번번이 조선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약속했지만 그들은 그 약속을 단 한 번도 지키지 않았고, 마침내는 36년 동안이나 우리를 짓밟고 유린했다.

 

 그 죄만으로도 엄중한데, 최근에는 한일 간의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 불만을 가지고 경제보복을 자행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백색국가에서 제외시키고 수출규제를 하고 있다. 이는 자유무역주의 질서에 반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일자 이번에는 안보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엄격한 기준을 세워 전략물자를 잘 관리하고 있는데도 우리를 못 믿겠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군사정보를 공유랄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한일군사정보협약인 지소미아 종료는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정부는 특사를 파견하고 다양한 외교적 노력을 했지만, 대화는 번번이 거절되었다. 이런 시점에 지소미아 종료는 일본의 막가파식 행동에 대한 주권국가로서의 당연한 귀결이었지만, 국내 여론은 크게 엇갈렸다. 한 쪽에서는 원칙적이고 단호한 정부의 결정을 환영했고, 또 한쪽에서는 많은 우려를 표명했다. 일부에서는 강대국인 일본과 대립하면 손해라며 정부를 비판했다. 그들은 아베총리의 국제적 상식에 반한 무도함과 야만을 탓하기에 앞서 정부의 전략 부재의 맞대응이라고 날을 세웠다. 강대국인 일본과 대결하는 것이 결코 쉬운 아닐 것이다. 단호한 조치 뒤에 우리가 감수해야 할 위험이 적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망할 것 같은 불안감을 조성하면서 무도한 아배정권을 두둔하는 것이 온당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달랐다. 일본의 독선과 횡포에 대해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면서 결코 ‘지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갑오년 백산 들녘에 죽창 들고 모인 동학농민군들의 의기를 다시 보는 것 같았다. 나라를 위한 걱정의 표현이겠거니 하는 생각을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순서가 잘못된 것 같아 씁쓸하다. 먼저 일본의 야만과 무도함을 따지는 데 힘을 합쳐야 했고, 그 다음 머리를 맞대고 대안을 마련했어야 했다.

 

 한일양국의 대립과 갈등은 일본에 대한 옹호와 관례 답습으로 해결한다면 우리는 일본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 이제는 주권국가로서의 당당함을 가지고 이 갈등을 풀어야 한다. 설사 한일관계가 조금 늦게 정상화되더라도 이번에는 당당하게 접근하면서 새로운 한일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승만 정권 이래 친일파가 판쳤던 우리나라를 보면서 그들은 우리를 얼마나 무시했을까. 그들은 우리들의 ‘냄비근성’ 운운하면서 머지않아 다시 자신들과 손발을 맞출 것이라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한다고 한다. 상황이 이런데도 일본 눈치나 살피자는 것이 대안인지 답답하다. 최근의 한일관계에 대응하는 우리의 극단적 분열주의를 보면서 ‘나라 없는 나라’, 구한말을 다시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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