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③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③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9.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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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사상 가장 길었던 날
경상도 좌우수영(慶尙道 左右水營) 싸우지 않고 도망
부산진 순절도

  해마다 2월이면 조선조정이 세양미두(歲陽米豆)라 해서 대마도에 주는 쌀과 콩 200섬을 받으러 일본배가 왔었으나 이 해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한 조짐은 그뿐이 아니었다. 부산의 왜관(倭館)에 있던 수십명의 일본인들이 슬금슬금 없어지더니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세유선(歲遺船)이라 불리는 무역선도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3월 상순 나고야를 출항한 선봉장 소서행장의 1번대가 13일 쓰시마의 오우라항에 도착, 대기했으며 가등청정의 2번대에 이어 3번대, 4번대의 병력이 속속 나고야를 출발, 이키도를 거쳐 쓰시마로 집결했다. 7백여㎦에 불과한 쓰시마섬이 7만여 대군과 이들을 실어나르는 전선들로 가득찼다. 이때 나고야와 쓰시마에 배치된 수송선단은 4만명의 병력을 동시에 실어 나를 수 있는 규모였다.

 3월27일, 풍신수길이 교토(東都)에서 천황 후양성(後陽成:고요죠)에 신고를 마친뒤 3만명의 직할군사를 거느리고 전방지휘소가 설치된 나고야로 향했다.

 4월13일 양력 5월23일 조선왕조 사상 가장 긴 날의 아침이 밝아왔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의 산야에는 언제나와 다름엇이 아침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부산진 참사 정발만이 아무래도 적이 곧 쳐들어 올것 같아 이날 전선 3척에 군사를 태우고 나가 해상훈련을 하기로 되어 있어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을 따름 조선의 천하는 전쟁 따위와는 아예 인연이 없는듯 한가롭고 평화로운 아침을 맞고 있었다.

 부산으로부터 하루뱃길 거리의 일본 쓰시마(對馬島) 오우라(大浦)항. 아침 8시 소서행장의 조선침공군 선봉 1번대 1만8천700명을 태운 7백여척의 대규모 소송선단(輸送船團)이 항구를 빠져나와 진용을 갖추면서 조선을 향했다. 날씨도 청명했고 바람도 순조로웠다.

 이날 하오 5시 쯤 침공군 선단이 부산 앞바다를 온통 뒤덮으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로부터 7년뒤, 1598년 무술년(戊戌年) 11월 "원수들을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라"며 최후의 결전을 편 조선수군 이순신(李舜臣)함대의 맹렬한 추격을 받으며 패주하는 침공군 선단의 꼬리가 수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출 때까지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의 동양 3국을 뒤흔든 朝日전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이날 정발은 예정대로 절영도(絶影島:영도)앞 바다에 나가 해상훈련을 실시한 뒤 귀로에 섬에 올라 군사들과 함께 사냥을 하다가 몰려오는 일본군의 대규모 선단을 발견하고 즉시 城으로 돌아와 전투준비를 하는 한편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에 보고하고 동래부사 송상현 등에 통첩을 보냈다.

 일본군은 이날 바다에 정박한채 대마도의 평조익이 소부대를 이끌고 상륙, 부산진성(釜山鎭城)을 정찰하고 돌아갔다.

 침공군은 바다에서 밤을 지샜다.

 침공군의 대규모 수송선단이 하루 낮을 항진해 오는동안 그리고 부산앞바다에서 제집 안마당인양 밤을 지새는 동안 조선 수군은 과연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여러해에 걸쳐 여러차례 침공을 공고해 왔었고, 불과 한달전에 평조익이 와서 최후통첩을 했던만큼 조선 수군은 마땅히 경계태세에 있었어야 할 것이고 바다에서 먼저 적을 요격했었어야 할 것이며, 다음에는 해안선에서 적의 상륙을 저지한 뒤 최후로 수성전(守城戰)으로 적을 막았어야 했다.

 동래에 경상좌수영(水使 박홍), 거제도에 우수영(수사 원균(元均))이 있었고 각 수영에는 큰배(대맹선(大猛船)=정원 80명) 14척, 중간배(중맹선=60명) 22척 합쳐 전투선 36척, 연락 또는 척후선으로 작은배(소맹선=30명) 78척씩 병력 각 5천980명씩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물론 실제의 전선과 병력이 얼마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박홍과 원균은 일본군이 나타나자 이들 배와 무기들을 바닷속에 가라앉혀 버리고 식량창고는 불태운 뒤 박홍은 언양(彦陽)을 거쳐 경주(慶州)로, 원균은 곤양(昆陽)을 거쳐 노량진(露粱津)으로 달아나 버렸다.

 단 한차례 싸워보지도 않은채 경상도 수군 1만여명이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박홍은 갈아나며 14일 아침 조정에 장계(狀啓)를 띄웠다.

 ’부산성(釜山城)이 함락됐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1월29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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