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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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9.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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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공군(侵攻軍) 총병력 28만6천명 나고야서 출진(出陣)
일본 나고야성

  1590년 3월 정여립 역모소동이 한고비 넘겨 일본에 통신사를 보냈고 이들이 다음해 1591년 1월28일 부산포에 돌아왔으나 그때까지도 연루혐의자들에 대한 숙청이 계속되고 있었다. 통신사 일행중 서장관 허성, 수행원 성천지(成天祉)가 부산포에 도착하자 마자 동래부사(東來府使) 고경명(高敬命)이 그들을 체포해 한양으로 압송했다. 허성은 여립이 그를 좋게 말한일이 있었다는게 이유였고, 성천지는 그가 전주판관(全州判官)으로 있을때 여립과 친했다는게 그 이유였다.

 이들은 곧 혐의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 풀려났으나 이번에는 고경명이 파직됐다. 고경명은 광주인으로 여립과 친했다는게 이유였다. 후임으로 그해 8월에 송상현(宋象賢)이 부임했다.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 일행이 침공해 온다, 안온다로 논란을 벌이고 있던 그해 3월, 풍신수길은 일본 전역의 영주들에게 총 2천척에 달하는 배를 만들고 선원을 차출하도록 명령했다.

 정여립 역모를 적발했다해서 벼락출세시킨 한응인(韓應寅)을 진태사(陳泰使)로 하여 명예 다녀오게 한 8월에 수길은 九州 서북단 나고야를 조선침공군의 발진기지(發進基地)로 정하고 대대적인 축성(築城)공사를 준비했다.

 조선과의 중간지점에 있는 일기도(壹岐島:이키)와 대마도(對馬島:쓰시마)에서 대규모 기지공사에 들어갔다.

 나고야로부터 이키까지는 40km, 쓰시마까지는 1백47km, 부산포까지는 2백km의 거리다. 쓰시마의 오우라항(대포항大浦港)으로부터 부산까지는 53km에 불과하다. 이들 항구들은 1천여척 이상의 전선(戰船)이 한꺼번에 정박할 수 있는 천연의 군항들이었다.

 그때의 조선 조정은 물론이고 그뒤의 한국인들은 풍신수길이 잔나비를 닮은 못난이에 무식한 칼잡이로만 알고 있었다. 매우 잘못된 인식이었다.

 일본인들이 불세출의 전쟁영웅으로 받들만큼의 탁월한 군사전략가였다. 그의 조선 침공전략과 작전계획 그리고 전쟁지도 과정을 살펴보면 완벽하고 치밀했으며 특히 그의 전쟁 동원능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수길의 조선 침공전략은 수륙병진책(水陸倂進策)이었다. 그는 조선의 육로가 부산 등 남쪽지방에서 두줄기 내지 세줄기로 중부지역 한양으로 이어졌고, 여기서 다시 평안도와 함경도로 나뉘어 이어지고 있다는 점, 특히 조선의 강들이 낙동강(洛東江)과 섬진강(蟾津江)은 남쪽에서 북쪽 내륙으로, 대동강(大同江), 임진강(臨津江) 한강(漢江) 금강(錦江) 영산강(榮山江) 등은 서쪽에서 동쪽 내륙으로 깊숙이 이어져 있음에 유의했다.

 그무렵 조선의 강들은 수심이 깊어 내륙 깊숙이 배가 드나들었으며 미곡 등은 거의 배로 실어 날랐다. 조선에 육로 즉 도로가 발달하지 못한 이유중의 하나였다.

 수길은 육로로 진격하는 한편 조선반도의 남해와 서해의 해로(海路)로 증원병력과 보급품을 수송, 강을 타고 내륙에서 합류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군사전략으로서는 나무랄데 없었으나 수길은 천려일실(千慮一失), 강력한 조선수군의 존재와 조선의병들의 봉기를 예측하지 못했다. 물론 이같은 사실은 조선 자신도 몰랐었다.

 수길의 침공준비는 신속하고 빈틈없이 진행되어 나갔다.

 나고야 발진기지 공사는 가등청정(加藤淸正:가토기요마사)의 설계와 지휘로 10월10일 착공됐다. 조선에서도 전국의 城을 수축하고 있을 때였다.

 나고야城은 사방 3km에 수길이 머물게 되는 본성(本城)외에 각 지방 영주들이 머무는 1백60개 성군(城群)으로 평소 10만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본성은 14만4천㎥ 즉 4만6천평 규모로 5층 높이의 화려한 천수각(天守閣)이 지어졌다. 거대한 이 석축군(石築群)을 놀랍게도 다음해 1592년 2월28일까지 5개월만에 완성했다. 연 30만7천985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여기서 조선으로 출진한 병력이 연 20만5천570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모든것이 주먹구구인 조선에 비해 일본은 인원수 하나도 철저하게 세어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1월29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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