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개전전야 ⑥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개전전야 ⑥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8.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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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흡(未洽)한 국방체계(國防體系)에 당쟁(黨爭)만 일삼아

  군국기무(軍國機務)를 관장하는 비변사(備邊司)의 최고 책임자인 도제조(都提調)도 전현직 의정(議政) 즉 정의정, 좌·우의정이 겸직하고 제조(提調)들 또한 문신들인 이吏·호戶·예禮·병조兵曹판서와 강화유수(江華留守) 등 5인이 겸직했다.

 선조 25년에야 부제조(副提調)를 두어 병무(兵務)를 아는 사람이 배치됐다.

 경관(京官) 즉 조정의 군사분야 뿐아니라 외관(外官) 즉 지방의 군사분야도 대부분 문신들이 겸직했다.

 전국 8도에 4대도호부(四大都護府:경주慶州·전주全州·영흥永興·평양平壤) 48도호부, 20주州, 82군郡, 1백75현縣이 있었는데 道의 관찰사(觀察使:감사監司) 州의 목사(牧使), 부府의 부윤(府尹) 군의 군수(郡守)와 현령(縣令)및 현감(縣監) 등이 행정 및 사법은 물론 병권까지 쥐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문신이라 해서 전적으로 믿은것은 아니었다. 관찰사의 임기를 1년으로 제한했고, 연고지 배치를 금지하여 지방에 세력을 심지 못하게 했다. 주민감시도 철저하여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라 하여 5호를 1통으로 감시케 했다.

 국방과 민생은 외면한채 국가제도와 온갖 정력을 정권유지에만 쏟았던 것이다.

 조정의 국방관(國防觀)이 어떤것이었는가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십만양병론(十萬養兵論)에 대해 "병兵을 키우는 것은 화禍를 키우는 것(養兵 是養禍也)"이라고 묵살해 버린 사실로도 알 수 있었다.

 조선왕조의 병역제도는 고려 이래의 농병일치제(農兵一致制)였다.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농민들을 윤번제로 징집, 현역에 봉무케 했다. 현역을 상번(上番), 대기자를 하번(下番)이라 했으며 하ㅓㄴ에게는 군포(軍布)를 내게해서 군비에 썼다.

 그무렵 조선 조정은 이미 부패하기 시작했다. 일선 지휘관들이 상번으로부터도 군포를 받아 착복하고 멋대로 현역을 면해 주었다. 이같이 하는것을 방군수포(放軍收布)라 했다. 조정이 손을 썼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조정이 이를 양성화시킨 일이다.

 병역의무자로 하여금 현역 복무 대신 아예 포布를 바치게하고 조정이 이를 거두어 군사력이 필요한 군영(軍營)에 보내면 그곳에서 필요한 병력을 돈을 주고 고용하는 것이다. 布가 곧 돈이었다.

 일종의 직업군인제도라 할 수 있고, 용병제도라 할 수 있다. 이를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라 했다.

 얼핏 그럴싸한 제도였는데 병영은 텅 비어 나갔다.

 웬만하면 布를 바치고 병역을 면제받았고, 그럴 수 없는 농민들은 피역(避役)이라해서 도망을 다녔다. 또 軍布가 제대로 쓰여지지도 않았다.

 조정에서 다른 비용으로 돌려 써버리고 병영에 내려주지도 않았고, 내려준다해도 중간에서 횡령(橫領)착복을 해 버렸다.

 그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노인들이나 소년들이 붙잡혀와 있었으니 군대라고 할것이 못되었다.

 북방 6진(六鎭)의 병력까지도 모자라서 선조 16년 2월12일 자원해서 3년이상 복무하면 서얼 즉 첩의 자식도 과거를 볼 수 있게하고 공천(公賤) 즉 관청의 노비는 양민으로, 사천(私賤)은 공천으로 해주었다. 원래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아 병역의무를 면제해준 노비들의 군대가 된것이었다.

 조선의 군대편제는 원래 진영제(鎭營制)라 해서 오위도총부를 도우 별도의 군사를 지휘했다. 국방상 중요한 함경 및 전라, 경상 3도에는 병영과 수영을 따로 두었다.

 함경도의 국경에 북병영 및 북수영 북청北靑에 남병영 함흥에 남수영, 전라도의 강진康津에 병영, 여수麗水에 좌수영, 남해南海에 우수영, 경상도의 진주에 우수영 울산에 좌수영, 거제巨濟에 우수영, 동래東來에 좌수영을 두었다.

 1555년(명종 10년)에 왜구 수십척이 전라도 해안을 침공한 사건을 계기로 진관제(鎭管制)를 버리고 제승방략(制勝方略)으로 바꿨다. 진관제는 군사를 각 진에 분산 배치하는 지역방어 개념이었으나 제승방략은 군사를 한 곳에 모아 두었다가 사태가 일어난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기동방어 개념이었다.

 그리고 순변사(巡邊使)와 방어사(防禦使)및 조방사(助防使)를 두어 각 도의 병영및 수영의 군사를 지휘하게 했고, 도순변사(道巡邊使)를 두어 여러 道를, 도원수(都元帥)를 두어 전국의 병마를 지휘케 했다.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유명무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진관제와 제승방략 어느쪽도 제도적으로 확실하지 못해 국방체계가 분명치 못했다.

 이같은 국방부재 속에 왕은 왕권유지에, 조정의 문신들은 왕에 대한 충성을 명분으로 피투성이가 된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을 일삼았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1월15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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