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개전전야 ⑤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개전전야 ⑤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8.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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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義州)목사의 뜻밖의 하옥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 전투 모습 / 육군사관학교 평가실 제공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 전투 모습 / 육군사관학교 평가실 제공

  명에 간 김응남의 보고를 받은 조정은 그때서야 크게 놀라 한응인(韓應寅)을 진태사(陳泰史)로 급파, 해명하는 한편 비로소 일본 침공에 대한 대비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정에는 모두가 문신들만이 있었다. 군사지식은 까막눈인데다가 적정(敵情)마저 깜깜했다. 대책이 나올리가 없었다.

 다만 한가지, ’일본은 섬나라’라는데서 의견이 일치 되었다.

 ’왜병(倭兵)은 수전(水戰)에 능(能)할 것이나 육전(陸戰)에 약할 것이다’

 전국 특히 영·호남의 성(城)을 수축하여 육지에서 막기로 했다.

 백성들을 부역으로 동원, 성을 수리하고 활과 화살촉 갑옷과 투구도 만들어 비치케 했다.

 성울 수축하는데 드는 비용은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들였다.

 경상도 감사 金수는 전력을 다해 성을 수축했다. 동래읍성(東來邑城), 부산진성(釜山鎭城), 진주성(晋州城), 울산병영성(蔚山兵營城), 성주성(星州城), 영천성(永川城), 상주성(尙州城), 대구성(大邱城), 안동성(安東城) 등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백성들은 부역에 동원되고 물자를 바치라는데 좋아할리가 없었다.

 원성이 일어났고, 고을의 유생(儒生)들이 상소를 올려 항의했다.

 김성일이 또 시비를 걸었다.

 "수성(修城)은 비허(非許)인데 백성들의 노역을 동원하여 원성이 높다"

 1591년(선조 24년) 12월1일 전쟁이 터지기 4개월 전, 영의정 이산해(李山海)가 선조의 허락을 받아 ’각도해민지금(各道害民之禁)’이라는 지시를 내려 수성공사를 중지시켜 버렸다.

 그도 동인이었다.

 뒷날 선조가 피신을 갔던 압록강변 국경도시 의주(義州)목사 김여균(金汝均)도 열심히 성을 수리하고 군사를 훈련시켰다.

 조정이 그를 갑자기 옥에 가두었다. 진태사로 명에 다녀오던 한응인이 "명이 코앞에 있는 의주성을 수축하고 군사를 단련시킴은 명의 오해를 받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국방을 튼튼히 한 죄’였던 셈이다.

 城의 수축공사는 어차피 헛일이었다.

 일본군은 수전의 용사들이 아니라 육전의 용사들이었다.

 백년 전국시대. 그들은 바다에서 싸운게 아니라 공성전(攻城戰)을 중심으로 육지에서 싸웠다. 전쟁이 터진후 일본군은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간단히 합락시켜 버렸고, 나머지는 조선의 관군들이 모두 성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던 것이다.

 城을 수축했어도 이를 지킬 군사가 없었다.

 1592년 朝日전쟁을 조명하면서 기이하기 그지없는 두 번째의 의문은 ’어떻게 되어있던 정부였길래 그렇게까지도 나라를 지키는 군대가 없을 수 있었느냐?’하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헌법격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조선 전역에 20여 만명의 군대가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무렵, 조선에 군대가 과연 얼마나 있었는지는 어느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고, 당시의 조정 조차도 이를 모르고 있었다. 그냥 북방 여진족에 대비한 수천명,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있는 전국 15개 진영(鎭營)에 각각 몇 백명씩, 모두 몇 천명, 그리고 관아에 몇 십명씩의 군사가 있어 모두 몇 만명쯤 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할 따름이다.

 조선왕조는 관료국가(官僚國家)이고, 유교국가였다.

 충효(忠孝)를 근간으로 하는 유고를 지도원리로 하여 철저하게 문숭무천(文崇武賤)의 관료조직으로 짜여졌다.

 고려왕조 말기 무신(武臣)정권의 폐해를 경험한 교훈도 있었으며, 태조 이성계(李成桂) 자신도 고려 무신으로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빼앗은 탓이어서인지 건국후 무신들의 세력화를 철두철미하게 경계했고, 군사력 자체를 경원시 했다.

 관료를 동반(東班)과 서반(西班) 즉 양반(兩班)으로 나누어 문관인 동반 중심으로 운영해 나갔다.

 국가의 주요 정책을 의결하는 의정부(議政府)에 태조때는 二品이상 문무관이 참여했으나 2대 정종(定宗)때부터 문관만 참여케 했으며, 국방부장관격인 호조판서(戶曹判書)도 문관이 독점했다.

 전쟁이 터지기 직전 대사헌에서 병조판서로 전보된 홍여순(洪汝諄)은 누이동생이 미인이어서 선조의 후궁이 되는 바람에 벼락출세 했으나 군사지식에는 멀쩡한 문신이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1월15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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