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개전전야 ④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개전전야 ④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8.2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朝鮮), 국방(國防)없는 이상한 유교국(儒敎國)
소서행장 / 위키미키 제공
소서행장 / 위키미키 제공

 풍신수길의 눈만 보고 돌아와 침공 해온다, 안 온다로 다투자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이 김성일에게 물었다. 같은 東人들이었다.

 "그러다가 만일 일본이 쳐들어오면 어쩌려오?"

 "나 역시 안 쳐들어 온다는 것이 아니요. 윤길이 그렇게 말하여 행여 민심이 동요할까 걱정되어 그렇게 말한 것이요"  (징비록:유성룡)

 국난에 대한 우려에 앞서 반대파의 주장에 우선 반대부터 해놓고 본것이었다.

 서장관 허성도 "침공 해 온다"고 무관으로 따라갔던 황진(黃進)은 김설일의 허위보고에 크게 분노, 그를 규탄했으나 누구 하나 들으려 하지 않았다.

 통신사 일행이 귀국할때 대마도의 종의지와 헌소가 따라 들어왔다. 수길의 침공의사를 전하고 조선 조정이 외교적으로 손을 써 전쟁을 막도록 설득을 계속해보려 했다.

 선위사(善慰使)로 이들을 안내한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 오억령(吳億齡)이 현소로 부터 들은바를 조정에 보고했다.

 "현소가 분명히 말하기를 내년에 조선의 길을 빌어 명나라에 쳐들어간다고 합니다" (현소명언玄蘇明言 래년장가도來年將假道 입범상국入犯上國)

 쓸데없는 보고라며 조정은 응교(應敎) 심희수(沈喜壽)로 선위사를 갈아치워 버렸다.

 현소가 김성일을 비밀리에 만났다.

 "관백(關白=풍신수길)이 明을 치러 하는 것은 명이 오랫동안 일본의 조공도 받아주지 않고 단교를 하고 있어서 그런다. 조선이 이를 명에 알려 조공을 받아주고 수교를 하면 전쟁을 막을 수가 있다"

 김성일이 현소를 점잖게 타이르고 말아버렸다.

 이들이 갖고 온 풍신수길의 국서에는 "내가 명을 치겠으니 조선은 앞장서라"는 분명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수길이 조선을 치겠다고 하지 않고 명을 치겠으니 길을 내라(征明假道)고 한데는 사연이 숨겨 있었다.

 소서행장과 종의지 등 일본내 비둘기파들이 통신사 일행을 조선의 항복사절로 수길을 속였다. 수길은 조선은 이미 항복했으니 다음 차례는 명을 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든 전쟁은 터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조정은 김성일의 허위보고를 믿는 쪽으로 기울어졌고, 침공해 온다는 주장은 평지풍파를 일으켜 민심을 어지럽히는 부질없는 짓으로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리는 분위기가 되었다.

 일본은 침공 안해오는 것으로 하고, 다만 이 사실을 명에 알리느냐 않느냐로 논란끝에 알리기로 하고 성절사(聖節使)로 김응남(金應南)을 파견했다.

 1591년 7월 무렵이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히려 조선의 통보가 없자 일본과 짜고 함께 쳐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복건성(福建省)의 무역상 진갑(陳甲)이 윤구(玧球:오끼나와)에 들렸다가 침공 소문을 듣고 복건성 순무(巡撫-省長) 조삼로(趙參魯)에 알렸으며 즉각 조정에 보고됐다.

 유구의 중상왕부장사(中上王府長使)정(鄭)동도 명에 알려왔고, 왕세자 상녕(尙寧)은 통사(通史) 정적(鄭迪)을 보내 알려왔다.

 김응남이 명의 조정에 도착하기 전의 일이었다.

 왜구에 붙잡혀와 유구에서 한약방을 하고 있던 강서성(江西省) 출신 허의후(許義後)도 주균왕(朱均旺)을 보내 사실을 알려왔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1월15일 게재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