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칠레에서 온 편지
#4. 칠레에서 온 편지
  • 밥장(장석원)
  • 승인 2019.08.20 18: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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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년 6월 25일 화요일

 이스터섬에 가는 비행기가 아침 6시 30분 출발이라 숙소에서 새벽 4시에 공항으로 떠났다. 칠레이긴 하지만 5천 킬로미터 넘게 홀로 뚝 떨어져 있는 곳으로 5시간 정도 걸린다. 공항에 내리자 벌써 숙소 직원들이 손님을 맞으러 꽃다발을 손목에 건 채 기다리고 있었다. 로맨틱 코미디나 미드에서 나올 법한 친구가 내게 꽃다발을 목에 걸어주었다. 조금 허접했지만, 기분은 무척 좋았다. 숙소인 미히누아 캠핑장은 차로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바다가 바로 코 앞이었고 잔디가 깔린 마당에 작은 텐트들이 군데군데 세워져 있었다. 33번이 내가 3일 동안 묵을 텐트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작았다. 허리를 잔뜩 구부려 들어가니 매트가 깔려 있었고 얇은 침낭이 마련되었다. 딱 한 사람이 눕거나 앉으면 충분한 크기였다.

 내일은 사륜구동 바이크를 빌려 섬 구석구석을 둘러봐야지.

 #. 2019년 6월 27일 목요일

 어제 섬 한 바퀴를 다 돌아서 오늘은 꼭 가고 싶은 곳 세 군데만 골랐다. 오롱고 앞 운석구 안 습지대. 라노 라라쿠. 푸나파우다. 먼저 운석구 습지대인 라노카우를 갔는데 보자마자 감탄사가 아재처럼 터져 나왔다. 동그랗게 패인 커다란 운석구 안에 저들만의 완벽한 생태계가 갖추어져 있었다. 지도를 보니 지름만 거의 1km에 가까웠다.

 라라쿠가 이스터섬의 하이라이트인지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직접 보고 그리려고 모아이 앞에서 몰스킨을 꺼내 들었고 두 시간 동안 꼼짝 않고 그렸다. 일본, 중국, 한국, 칠레, 브라질, 페루,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미국, 영국인 그룹들이 내 앞을 지나갔다. 두 번째 모아이를 막 그리려는데 비가 쏟아진다. 지나가는 비일 줄 알았는데 빗줄기가 더 굵어진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날씨는 꿈에서나 만날 수 있을 법했다. 변화무쌍했다. 결국 굵은 빗줄기를 뒤집어쓰며 사륜바이크를 끌고 되돌아왔다. 얼굴부터 발끝까지 빗물과 흙탕물을 뒤집어썼다. 길에 말똥이 참 많던데...

 모아이 머리장식인 푸카우를 만든 장소인 푸나파우. 내성적인 여행객이라면 다른데보다 여기를 더 마음에 드는 장소로 꼽지 않을까 싶다. 사람이 거의 없는데 1분 1초가 아까울 만큼 멋지다. 항가로아와 앞바다 풍경은 덤이었다.
 

 #. 2019년 7월 2일 화요일

 일찍부터 장비(라고 해봐야 일식 관측용 안경이지)를 챙겨서 해변으로 나갔다. 조용한 마을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벌써 사람들로 가득했고 도로는 주차할 곳을 찾는 차들로 주차장보다 더 붐볐다. 미리 자리를 잡은 이들은 느긋하게 누워 이른 낮잠을 즐겼다. 우리도 모래 위에 돗자리를 펴고 자리를 잡았다.

 일식은 1시간 전부터 시작된다. 달그림자가 조금씩 태양을 가린다. 먹혀 들어간다는 말이 딱 맞았다. 5분, 10분마다 일식 관측용 안경을 쓰고 태양을 바라보았다. 맨눈으로는 여전히 눈부시지만 해는 조금씩 조금씩 달그림자에 먹혀 들어갔다.

 개기일식은 정확히 오후 4시 38분에 이루어진다. 10분 전부터 눈에 띄게 주위가 어두워졌다. 공기도 손이 시릴 만큼 차가워졌다. 개기일식은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닌 온몸으로 느낀다는 말 그대로 소름끼치는 이벤트였다. 새들도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가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시간이 가까워오자 안경 너머 태양은 붉은 손톱처럼 보였다. 과감하게 안경을 벗으니 개기일식 몇 초 전 무지개빛이 섞인 하얀 섬광을 내뿜었다. 다이아몬드링이었다. 몇 초 뒤 태양은 완전히 검게 변했고, 주위로 다이아몬드 빛깔의 코로나가 조용히 이글거리며 반짝거렸다. 주위는 태양만큼 어두워졌고 사람들은 박수를 치거나 소리를 질렀다. 난 그대로 얼어붙었다. 나의 시간은 검은 태양이 뜨기 몇 초 전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그때 내가 본 빛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경험 그 자체였다. 2분 뒤 태양은 제 빛을 되찾아 밝게 빛났다. 우리는 다시 안경을 썼다. 머리 위에 갈매기들은 공포에 질린 듯 지들끼리 모여 날지도 내려앉지도 못한 채 한참을 그 자리에 떠 있었다. 드디어 나는 그 빛을 보았고 개기일식의 순간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제서야 눈에 눈물이 맺힌 걸 알았다.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서 여행을 돌아보면 어떨지 궁금하다. 모르긴 해도 사진 대신 몰스킨과 펜을 가지고 다니며 기록한 걸 대견하게 여길 것 같다. 어떻게 글씨를 요만하게 맨눈으로 쓸 수 있었는지 신기해하며 돋보기안경을 꺼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렇게 끝은 아니다. 곧 또 떠날거다.  

 

 글 = 밥장(장석원)

 

 ※‘예술배낭여행’은 수요일자 문화면을 통해 격주간으로 완주문화재단의 웹레터와 동시에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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