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삼재(三齋)의 자주독립 열망과 항일정신이 깔려 있는 전주한옥마을
호남 삼재(三齋)의 자주독립 열망과 항일정신이 깔려 있는 전주한옥마을
  • 양병웅 기자
  • 승인 2019.08.15 14: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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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심 선생, 이병은 선생, 송기면 선생
최병심 선생, 이병은 선생, 송기면 선생. 전주한옥마을 선비문화관 제공.

“오래전 일제의 탄압에 당당하게 맞섰던 최병심 선생, 이병은 선생, 송기면 선생 등 호남 삼재(三齋)의 숭고한 희생 정신이 전주한옥마을 곳곳에 서려 있습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후손들은 이분들의 이름을 한 분 한 분 소중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전주의 대표적 명소로 한 해 1천만 명이 넘게 찾는 ‘전주한옥마을’은 다양한 문화자산에 볼거리도 많은 곳이지만 이 곳이 형성된 바탕에 항일정신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실제 한옥마을에는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한 선비들이 일제에 저항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지난 1930년대 일제는 호남지역의 쌀을 좀 더 수월하게 수탈해 갈 목적으로 전군가도를 만들고 전주성곽을 허물어 전주 4대문 안에 일본가옥을 짓고 상권을 확대해 세를 불리기 시작했다.

 이에 대항한 선비들과 상인들은 하나 둘 모여 기와지붕을 얹고 약방과 양조장 등을 짓기 시작해 지금의 전주한옥마을을 형성했고 결국 일본인 거주지 확장은 한옥에 가로막혔다. 

 일제가 민족 정기를 끊기 위해 전라선 철로개설을 구실로 한벽당을 헐어버리려고 할 때 이에 강력하게 항거해 지켜낸 사람이 ‘호남 삼재’ 중 한명인 금재 최병심 선생이다.

 최병심 선생은 한벽당을 세운 조선 초기 문신 최담의 후손으로 일제가 식민지배 강화로 우리의 정신과 문화적 유산을 말살하려 하자 이를 계승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옥류정사라는 서당을 지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단식으로 일제에 항거하고 1912년에는 호남창의대장 이석용 의병장이 독립 밀맹단을 조직, 각 지역을 분담할 때 전주지방을 맡아 의병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고재 이병은 선생은 후학을 양성하고 항일의지를 도모하기 위해 완주군 구이에서 강학을 하던 남안재를 전주향교로 통째로 옮겨왔다.

 이병은 선생은 일제에 저항해 단발령을 거부하고 조희제 선생이 독립투사 이야기를 담은 염재야록의 발문을 작성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남안재는 민족문화를 보존하고 항일의지를 다지는 장소였고 해방 이후에는 향교 재건을 위한 중심지 역할을 했다.

 유재 송기면 선생은 유교의 생활규범을 철저하게 지켜가며 전통 유학사상의 토대 위에 근대 유학자로서 새로운 삶의 좌표를 설정하고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송기면 선생은 항상 제자들에게 “선비는 도를 위해 자신을 바치고 신하는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친다”고 강조했다.

 삭발은 물론 창씨개명을 거부하다가 일본경찰에게 온갖 협박을 당할 정도로 항일정신이 투철했던 송기면 선생은 서예에 뛰어났으며 주로 항일시를 써 일제에 저항했다.

 또한 전우의 부탁으로 임헌회의 신도비명을 비롯해 많은 비문을 쓰기도 했다.

 김석기 전북동부보훈지청장은 “호남 삼재는 가장 한국적인 정서가 깃들어 있는 오늘의 전주한옥마을을 있게 한 분들이나 다름 없다”며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전주는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이 치열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평생을 헌신한 호남 삼재의 선비정신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양병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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