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여름휴가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 이소애
  • 승인 2019.08.12 18: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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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날 같은 햇살이 무자비하게 한낮을 달구는 하루다. 정수리에 꽂히는 것 같은 햇볕이 무서운 날엔 무작정 집을 나서는 일도 태양과 맞싸우는 해법이다.

 초포다리 건너 완주군청을 지나면 가로수를 만난다. 영원히 피고 또 피어서 지지 않는 꽃 무궁화 꽃이 100여 일간 피고 진다.

 우리 겨레의 단결과 인내, 끈기, 진취성이 담긴 나라꽃이 맞이하는 길은 더위를 달래는 길이다.

 몰래 숨겨둔 빛바랜 태극기가 펄럭이며 독립운동가로, 사발통문 이름 석 자로 죽창을 들고 걸어가고 있는 가로수 무궁화 꽃이 마음을 사로잡아 더위가 가신다.

 일본제품 불매운동에 동참하고 경제보복 규탄하러 애국가를 차 안에서 불러본다. 무궁화 꽃은, 나무 한 그루에서 삼천 여송이가 이틀 동안 세상에 얼굴 내밀었다가 땅에 떨어진다고 한다.

 차라리 동백꽃처럼 온몸 하늘을 향하여 꽃이 시들었으면 하는데, 무궁화 꽃은 바람을 품에 안고 돌돌 말아 땅에 눕는다. 처량하다. 안타깝다. 치마를 돌돌 말아 몸 비틀면서 흐느끼는 여인의 모습이다. 가슴 찡하다.

 “삼천리강산에 우리나라 꽃”

  팔짝팔짝 어린 시절 나를 키웠던 고무줄 동무는 어디에서 이 더위를 부채질하고 있을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구불구불 골목에 우뚝 서 있는 전봇대에 이마를 대고 동내 떠들썩 소리를 지를 때 맘씨 고운 전봇대는 술래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밥상머리에 앉아서도 동생들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고 하면 몰래 숟가락을 감추기도 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무궁화 꽃은 나라꽃이라 함부로 꺾지도 않았다.

 해가 지기 전에 완산칠봉 녹두관에 들렀다. 헉헉거리는 가쁜 숨을 진정시켜가면서 마치 내가 의병의 혼과 함께하는 것처럼 없던 힘이 솟았다.

 생각만 하여도 두 손 불끈 쥐어지는 노래가 들려 온다. 슬프다 못해 철이 들면서 분노가 무겁게 젖어 있는 노래다.

  “새야새야 파랑새야/녹두밭에 앉지 마라//녹두꽃이 떨어지면/청포 장수 울고 간다”

 이 노래는 가물가물 희미하게 떠오르는 어머니의 자장가였다. 내가 발뒤꿈치 마룻바닥에 번갈아 가며 문지르다가 눈물 한 양푼 넘치도록 울면 어머니는 눈 크게 뜨시면서 나에게 겁을 주었다. 울면 순사가 와서 잡아간다는 협박이다. 모자 쓰고 옆구리에 긴 칼(?)을 찬 순사는 귀신 다음으로 무서웠다. 어머닌 무서워 벌벌 떠는 시늉을 하면서 두 손을 오므려 나팔을 불었다. 대문 밖으로 크게 소리 질렀다. 날 잡아가라는 공포의 소리였다.

 훌쩍거리는 나의 눈물을 어머니는 치맛자락으로 닦아주시며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셨다. 어머니의 손은 비릿했다. 저녁 밥반찬에 간갈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낮은 음표를 오선지에 그려놓고 어머니는 자장자장 은하수에 쪽배를 띄우셨다. 어머니 자장가는 늘 목구멍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녹두꽃은 가물가물 시들고 파랑새는 훨훨 날 꿈나라로 업고 다녔다. 자장가가 끝나기 전 잠들어 버려서 여태껏 청포 장수 울고 가는 길은 모른다.

 나이 들어서도 불면증으로 시달릴 때면 가끔 청포 장수가 울고 간다.

 어렸을 적 골목을 나서면 눈깔사탕 사러 점방에 가는 길은 무궁화 꽃이 피었다. 무궁화 꽃이 필 때는 평상에서 저녁밥을 먹었으며 부채와 모깃불 연기가 마당에 가득했었다.

 무궁화 꽃을 마음에 담아 보는 여름 불볕더위 휴가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애국심은 나라의 꽃과 함께 나의 존재를 불러보는 일이다.

 이소애 <시인/전주문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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