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역사 왜곡과 미화된 영화
지나친 역사 왜곡과 미화된 영화
  • 이복웅
  • 승인 2019.08.05 18: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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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해 전 덕혜옹주와 조선왕조의 마지막 후예들의 삶을 다룬 영화 ‘덕혜옹주’가 관람객 천만을 돌파했었다 당시 흥행에는 성공했을 줄 몰라도 민족의식과 독립의 힘도 없었던 대한제국의 황실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왜곡했다는 지적을 면할 수 없었다. 우리의 부정적 역사를 각색으로 극복하려는 일은 마땅히 삼가야만 한다 근래에 와서 나라를 망국으로 몰고 간 사실조차 감추거나 자존심을 앞세워 역사를 미화하고 각색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고 있다. 고종의 아관파천의 치욕의 길을 ‘고종의 길’로 복원한 서울시의 한 예다.

 뿐만 아니다. 세종의 한글 창제를 두고 승려인 신미가 주도적으로 했다는 역사왜곡의 영화 ‘나랏말싸미’ 그렇다.

 영화에서 덕혜옹주가 상해로 망명을 시도한다든가 일본에 있는 조선어린이들을 위해 한글학교를 세우고 강제 징용된 조선노동자들 앞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고 한 연설 장면은 모두가 사실이 아니다.

 조선의 26대 왕 고종은 일찍이 9남 4녀의 자식이 있었지만 대부분 어렸을 때 죽고 장성할 때까지 생존한 사람은 명성황후 민씨 소생인 순종 이 척, 귀인 장씨 소생인 의친왕 이강, 귀비 엄씨 소생 영친왕 이은, 복녕당 양씨의 소생 덕혜옹주까지 3남1녀뿐이었다. 더군다나 고종이 환갑 때 얻은 덕혜옹주는 고명딸로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덕혜옹주는 만 4살 때부터 덕수궁에 설립한 유치원에서 일본인 교사와 일본인 가정교사 밑에서 자랐으며 소학교 2학년부터는 일본인 자녀들이 다니는 일출소학교에 편입하였다.

 상궁 김명길이 쓴 「낙선재 주변」이라는 책에서 “덕혜옹주는 게다를 신고 하오리를 걸치고 ‘호타루’ 찬가를 부르시곤 했는데 그 모습이 일본 아이들과 똑같아 섬뜩했던 기억이 난다”고 기술하고 있다. 덕혜옹주는 1925년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났다. 생모 양 귀인은 옹주의 유학을 반겼다고 한다. 영화에서 덕혜옹주는 쓰시마번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을 온 마음으로 거부하지만 실제로는 결혼 전 18세 때인 1930년에 ‘조발성 치매증’진단을 받았다. 결혼은 이미 앓고 있었던 정신병 때문에 자기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심리적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그 분노는 덕혜옹주가 아니라 조선의 여론이었다. 1931년 덕혜옹주가 결혼하자 당시 조선일보는 소 다케유키를 삭제하고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덕혜옹주만 실어 민족의 분노를 나타냈다. 또한 영화에서 영친왕이 상해 망명을 시도한 것으로 그려진 부분도 망명을 시도한 사실조차 없었던 일이다. 영친왕 이은(1897-1970)은 1909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나 곧바로 일본으로 끌려가게 되지만 일본에서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받으며 일본육군사관학교를 거처 육군중장까지 지냈으며 또한 일본군 장교로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선전, 선동에 활동하기도 했다. 영화에서 상해 임시정부 망명시도는 그의 이복형인 의친왕 이강(1877-1955)이 1919년 11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탈출, 압록강 건너 안동까지 갔으나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던 망명 사건을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영친왕은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 내각에 아무쪼록 지금과 같이 대우를 해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광복 후 MIT에 유학한 아들 이구의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일본에 귀화해 일본여권을 받기도 했다.

  의친왕의 차남 이 우가 독립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이를 증명 할만한 자료를 찾아볼 수가 없다. 이우는 왕족 가운데 유난히 민족주의 성향이 두드러지지만 그 역시 일본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했으며 일본군 장교로 히로시마에서 복무하던 중 원폭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1945년 8월15일 동대문 운동장에서 그가 소속되었던 일본군 제17방면군 사령부 장으로 치러졌다. 패망이 공식화된 상황에서 벌어진 행사였다. 2007년 그가 원폭 당시 일본군이었다는 이유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논란이 있었다.

  끝으로 망국에 이른 통한과 치욕스러운 역사를 가슴 깊게 새겨 엄연한 역사 현실을 굴절된 이야기로 왜곡, 미화돼서는 안 된다 이에 따라 마지막 대한제국 황실 후예들의 부끄러운 삶의 모습은 적어도 우리 민족사에서 지워야 한다는 다짐을 영화 밖에서 한다.

  이 복 웅<사)군산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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