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시카고의 살인 폭염, 이름 없는 죽음을 애도하며
1995년 시카고의 살인 폭염, 이름 없는 죽음을 애도하며
  • 마재윤
  • 승인 2019.07.31 17: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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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만히 앉아 있어도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내리는 더운 날씨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비교적 올해 태풍이 순조롭게 지나간 덕에 안도의 한숨을 채 내쉬기도 전에 벌써 중복(中伏)이 지나고 곧 말복(末伏)이 다가오고 있다. 삼복(三伏)은 1년 중 가장 더운 기간으로 이를 삼복더위라 이르기도 하는데, 선조들은 하지(夏至) 때쯤 되면 모내기 후 김매기도 마무리되어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폭염을 이겨내기 위해 삼복(三伏)을 정하여 보양식을 섭취해왔다. 이따금 씩 보양이 필요한 시기마다 복날을 정하여 더위를 이겨냈던 선조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는 시기이다.

  필자는 폭염하면 1995년 시카고의 악몽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세계적으로 폭염도 재난(災難)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계기가 된 사고였기 때문이다. 당시 대참사로 낙인된 시카고 악몽은 지난 1995년 7월 13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낮 최고기온이 41℃까지 치솟으면서 시작됐다. 체감온도는 52℃에 이르렀고 그로부터 사흘 연속 38℃를 넘는 폭염이 이어졌다. 시민들은 길거리 소화전 뚜껑을 열어 그 물로 더위를 식혔고, 아무도 이 정도 기온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할 것이라고 누구도 상상을 못했다. 그로부터 폭염이 가장 기승을 부린 7월 14일부터 20일까지 단 일주일 만에 이 도시에서 739명이 사망했다. 경찰 조사와 부검 결과 ‘고온에 따른 사망’으로 분류된 사망자만 485명에 달했다.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 버그의 저서 ‘폭염 사회’에 따르면 폭염은 자연재해가 아닌 사회비극이라 표현한다. 시카고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 대부분이 눈에 잘 띄지 않는 노인, 빈곤층, 1인 가구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폭염은 차별적으로 가혹했던 것이다.

  이제 폭염으로 인한 재난이 먼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경우 기록적인 폭염 발생으로 온열질환자가 4,526명 발생했으며, 48명이 사망했다. 특히 온열질환자는 약 40%가 70대 이상으로, 7~8월에 집중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분석됐다. 고령화 시대가 급진적으로 다가온 만큼 시카고 폭염이 한국의 가까운 미래가 되지 않으려면 이에 따른 충분한 대비책이 절실할 것이다.

  전라북도 소방본부의 경우 지난 5월 말부터 9월 말까지 폭염 119안전대책본부를 구성해 폭염 대비 소방활동 종합대책을 추진중에 있다. 119구급차에 온열환자를 대비하기 위한 폭염 대응장비를 갖추고, 폭염대응 예비출동대를 편성하여 구급차 공백 시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각 지역 소방서의 심신안정실 등을 활용한 폭염 취약자 대상 119무더위 쉼터를 개방하고 무더위를 피해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도록 소방서가 문을 열었다. 이밖에도 폭염 속에 뜨거운 싸움을 벌이는 현장 활동대원들을 위해 무더위 휴식시간제 실시와 필수 활동을 제외한 무리한 야외훈련 자제, 얼음조끼, 쿨링스카프 제공 등 현장대원의 안전도 살피고 있다. 이처럼 폭염은 물리적 원인을 해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원인을 찾아 효율적으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노력해야 한다.

 1995년 폭염, 시카고 도심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한 공동묘지 한 켠에 160cm정도의 비석이 하나 서 있다고 한다. 이 비석이 세워지기 전 그 땅은 한 공터였는데 시카고시는 당시 그 공터에 관 수십 개가 들어갈 만큼 큰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나무로 된 관을 차례 놓았는데, 그 관에는 이름도 없었을 뿐더러 이들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폭염 때문에 죽었다’는 것뿐이었다. 이 추모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1995년 여름, 폭염 재난으로 숨진 이들, 가족도 이름도 없이 잊힌 이들을 기억합니다. 이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채 죽었지만, 미국과 일리노이주, 쿡카운티, 시카고 시민들이 기억하고 추모합니다. 존엄과 은혜, 희망과 평화 그리고 안식 속에 이 비극이 끝나길 바랍니다.” 1995년 시카고의 악몽, 이름 없는 죽음을 애도하며 이번 폭염 기간 큰 피해 없이 지나가길 바란다.

 마재윤 전라북도 소방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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