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용사 삶의 기억이 사회와 연결되길
참전용사 삶의 기억이 사회와 연결되길
  • 전북동부보훈지청
  • 승인 2019.07.31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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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보훈현장을 가다

시간은 쏜살같이 흐른다. 우리 역사에서 전쟁의 기억이 자리한 위치 역시 그러한 것 같다. 전란의 피해속에서 기적처럼 살아난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6월의 총성은 역사서에서나 나오는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진다. 전쟁의 잔향이 멀어짐에 따라 참전유공자의 시간도 짧아져 간다. 6·25참전유공자들의 평균연령은 거의 90세에 가깝다. 90년의 시간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기에, 그간의 기억이 누적된 자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을지 떠올리는 것은 언제나 상상하기 어려운 주제였다. 참전유공자의 마음은 더 상상하기 어렵다. 우리에게는 그저 오래된 역사로만 보이는 화약내음이 그들의 기억에는 생생히 새겨져 있으니.

  최근 고령 참전유공자들의 삶의 일면을 바라볼 기회가 있었다. 보훈처는 고령의 유공자들을 대상으로 찾아가는 복지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는데, 이 복지서비스의 최전선에서 유공자들의 얼굴을 마주보는 복지사와 섬김이분들과 함께 고령의 참전유공자 분들의 댁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미리 준비해 간 반찬을 나눠주고 간단히 가사를 도우며 말벗을 해드리는 등의 일이었는데, 그곳에서 이루어진 행위만을 놓고 본다면 다른 기관에서 행하는 일반적인 가사 도움 서비스와 크게 다를것이 없었다. 다만 특기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유공자가 사는 집, 그 방 안에 흐르는 기묘한 긴장감일 것이다. 유공자와 마주보고 있노라면 어김없이 흐르곤 했던 정체모를 긴장감은, 어느 분의 방에나 빼곡하게 벽에 걸려있던 참전의 흔적들(유공자증서, 태극기, 전우와 함께한 낡은 사진과 같은)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들을 본 후에 유공자의 눈을 바라보면 그제서야 통감하게 된다. 이 분들의 시간은 그 때에 멈춰서서 잠식되어 있구나.

  사람이란 누구나 자신을 증명할 수단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가족이나 친구로서, 어떤 조직의 일원으로써, 어떠한 성과를 이뤄낸 사람으로써, 사람은 그 상징을 붙잡고 살아가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나를 증명하는 수단은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하는 한편, 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라지기도 할 것이다. 시간이 상당히 많이 흐른다면 자기자신을 증명할 수단이 두어개밖에 남지 않을 순간이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순간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얼마나 귀중할까. 지금의 참전유공자에게 있어 그 때의 기억이란 그들의 존재를 지탱하는 몇 남지 않은 동앗줄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동앗줄은 우리 사회에서 점차 잊혀지는 전쟁의 기억으로 만들어져있다. 그것이 곧 고령 유공자가 사회에서 유리되는 현상의 전조는 아닐련지. 자기 자신을 세상 밖에 소개할 수단이 점차 없어진다는 것은 무섭고 슬픈 일이다.

  고령 유공자의 집을 방문하는 것은, 비단 그들의 집안일을 도우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남으로써 그곳에는 인연이 생긴다. 인연은 거듭하면 곧 사회속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된다. ‘참전유공자로서의 자신’과 더불어 ‘보훈가족과의 인연으로 묶인 자신’이라고 약소하게나마 이름을 붙이면 적절하게 들릴까. 그것이 전쟁 이외에 자신을 증명할 수단이 스러져가는 이들에 대한 새로운 삶의 근거가 되어줄 수 있을까.

  참전유공자의 댁을 방문해 반찬을 나눠드리고 청소 등의 집안일 돕는 동안, 어떤 분은 감사의 표시를 하시는가 한편 어떤 분은 오히려 본인이 미안한 일을 했다며 머쓱해 하시는 분도 있었다. 얼핏 보면 마치 재가 복지서비스라는 것이, 복지대상자를 향해 일방향으로 주어지는 것 처럼 보이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유공자분들에게서 돌아온 반응이 고맙다는 표현이건, 미안하단 감정이건 어떤 것이든 인연의 고리가 되어 나에게 되돌아온다. 그리고 그 인연 역시 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리라.

  지금의 참전유공자분들에게 그 시절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을까. 사람에 따라 그 경험의 세부사항은 서로 다르겠지만, 크게 보자면 공통적으로 가슴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 일평생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가장 큰 요소로 남게 될 것이다. 성급한 판단일지도 모르지만, 난 참전유공자들의 삶이 전쟁의 기억 속에 멈춰있는 것보다는 새로운 이웃과 사람들의 인연으로 사회에 연결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보훈처의 복지서비스는 바로 그런 걸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정원배 전북동부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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