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 정영신
  • 승인 2019.07.23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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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이육사의 시 <청포도>이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장맛비가 시도 때도 없이 오고 가고, 초복, 중복도 지나고 청포도가 익어 가는 7월이 가고 있다. 한국과 일본 간의 무역 등 여러 분야에서 비정상적인 마찰이 정치적으로 많은 문제가 되고 있는 요즘, 애국 시인 이육사의 ‘청포도’가 더 가슴 끝에 와 닿는다.

 이 청포도는 단순히 먹을거리로서의 소재가 아니다. 청색은 양의 색으로서 원시사회에서도 중요시했으며, 왕성한 식물에서 느낄 수 있는 강한 생명력과 맑음, 풍요로움, 희망을 상징한다. 또한 포도(葡萄)는 생기 있게 뻗어나가는 덩굴이 연속되는 수태(受胎)를 뜻하고, 덩굴손은 용(龍)의 수염을 닮았다고 해서 큰 인물의 잉태나 벽사의 의미가 부여되었다. 그래서 이 포도를 즐겨 먹으면 명이 길어지고 잔병이 없어진다고 믿었다.

 김제 백구 등 포도 산지마다 재래종 포도부터 개량종이나 수입 품종인 희귀한 포도까지 주저리주저리 열려서 한여름 태양빛을 머금고 다디단 내음을 온 산야에 뿌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이 재배하고 있다는 추위와 병충해에 강한 캠벨, 거봉, 원추형의 다노레드(Tanored), 씨 없는 포도인 힘롯드 시드레스, 블랙올림피아, 적색 포도주용 마스켓 베일리, 씨와 껍질을 모두 먹을 수 있는 대추 모양의 리자바트, 수송력과 저장성이 좋은 세라단 등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포도의 종류가 참 다양하다.

 이 포도는 문인들의 시작품뿐만 아니라 화가의 그림이나 도공들의 도자기 문양으로도 즐겨 사용되던 소재였다. 그림으로는 조선시대 이인문의 ‘포도’, 이계호의 ‘포도도’가 유명한데 두 그림 모두 싱싱한 포도송이와 포도 잎, 그리고 포도 잎을 스치고 휘감겨 뻗어 나온 덩굴들이 당장에라도 그 덩굴손을 내밀 듯 생동감 있게 붓끝으로 그려져 있다. 도자기의 경우도 주로 조선시대의 작품이 많은데 ‘백자 진사 포도문호’나 ‘철화 백자 포도문호’, ‘철화 백자 포도 율서문호’ 등의 작품을 보면, 특히 덩굴손이 도자기의 하단까지 늘어지면서 가늘고 굵고 휘감기고 뻗어나가는 그 다양한 모습들이 화려하게 표현되었다.

 이처럼 화가나 도공들이 그림이나 도자기에 그려 넣은 포도는 사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화선지에 그려진 포도의 쉬지 않고 길게 감기다 풀어져 나간 포도덩굴은 장수를 표상하고, 덩굴손은 영웅의 잉태나 벽사의 의미가 있으며, 왕과 하늘을 연결하는 용마의 젖에 비유되는 포도는 그 신성한 힘으로 인해 상서로움을 뜻한다.

 또한 열매가 풍성하게 열린 포도나무는 풍요와 열정, 다산, 생명을 상징하며, 봄이면 다시 겨우내 잎이 진자리에서 연푸른 새순이 돋아나기 때문에 부활을 의미한다. 특히 고려청자의 술병과 주전자에 동자(童子)들이 포도송이가 달린 덩굴을 잡아당기며 노는 모습이 상감된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는 그 당시 홍역 등으로 아이들이 어려서 많이 죽었기 때문에 아이들의 무병을 기원하는 벽병의 주술적 의미가 담겨 있다. 또 주렁주렁 열린 포도와 길게 이어진 덩굴은 ‘자손만대’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가문의 번영을 나타낸다. 그래서 포도 그림은 덩굴과 포도송이가 반드시 함께 그려진다.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청포도가 익어가는 7월이 가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무역 등의 마찰로 인해 정치적인 불협화음이 문제가 되고 있는 이 계절에, 이육사의 ‘청포도’에 등장하는 ‘내가 바라는 손님’이 ‘청포를 입고’ 이 나라에 찾아 와서 자손만대 길이길이 번창할 수 있도록 ‘청포도’의 상서로움과 희망, 풍요의 기적을 전해 주기를 기원해 본다.

 정영신<전북소설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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