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 우금치전투는 학살이었다
1894 우금치전투는 학살이었다
  • 김종회
  • 승인 2019.07.11 18:0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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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 방송사의 ‘녹두꽃’이라는 드라마가 장안의 화제다. 종방을 향해 달려가는 이 드라마가 최근 다룬 소재는 ‘우금치 전투’.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학살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눈에 핏발이 선다. 일본군의 잔혹함과 왕권 유지를 위해 일제와 손잡고 백성의 등에 칼을 꽂은 조선왕실의 무능과 비열함에 치가 떨린다. 동시에 우금치전투에 숨겨진 역사적 진실과 과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우금치전투라고 말한다.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정의다. 전투란 두 편의 군대가 조직적으로 무장해 싸우는 것이다.

 1894년 음력 11월9일,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농민혁명군 2만명과 조선 관군 1,500여명, 일본 육군보병 19대대 2중대 병력 200명, 일본 육군으로부터 훈련받은 신신군대인 교도중대 350명 등 ‘조일연합군’ 2,000여명이 격돌했다.

 동학농민혁명군이 의지할 것은 수적 우세와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불타는 정의감 뿐이었다. 무기라고는 화승총, 칼, 목검, 화살, 죽창이 고작이었다. 농민군 대부분은 죽창을 소지했으며 제대로 된 훈련조차 받지 못한 문자 그대로의 민병이었다.

 반면 일본군과 조선관군은 독일제 쿠르프 야포, 캐틀링 기관총,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 일본이 자체개발한 무라타 소총 등 최첨단 무기로 무장했으며 최신식 군사훈련을 받은 정예병으로 구성됐다.

 결과는 참혹했다. 야포와 기관총의 가공할 만한 위력 앞에 동학농민혁명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이 전투에서 동학혁명군은 조일연합군이 장악한 우금치 고개를 향해 40~50차례 온몸을 던졌지만, 무위에 그쳤다. 동학군은 전통적인 전술인 밀집대형을 유지하며 1㎞에 달하는 오르막길을 아무런 엄폐물 없이 내달렸다. 그렇지만 밀집대형은 야포와 기관총, 사정거리 1.8㎞인 소총의 조준만 더 쉽게 만드는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이 결과 최소 1만5,000여명의 막대한 희생자가 발생했다. 반면 조일연합군의 사망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1만5000:0.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일방적 학살이자 살육이다. 때문에 우금치전투가 아니라 우금치학살이다.

 고종은 운명이 다한 알량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에게 동학농학혁명군 진압을 요청했다. 조선 관군과 일본군이 연합작전을 벌인 것은 고종의 승낙이 없었다면 불가능할 일이었다. 호남의 심장부 전주성을 접수한 뒤 폐정개혁 실시를 확약하는 ‘전주화약’ 체결 후 자진 해산한 동학농민혁명군은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자 이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2차 거병했다. 이 땅과 민족의 자존을 지키고자 들불처럼 일어난 동학농민혁명군에게 조선왕실은 일본군과 연합해 발포했다.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군대와 기관총 등 신식무기를 국민에게 들이댄 정권(왕조)의 몰락은 필연이다. 보위를 지키기 위해 일본군을 끌어들인 고종은 결국 조선을 송두리째 일본에게 빼앗기는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동학혁명군과 백성들이 무능하고 부패하며 동포를 살육한 왕조를 용서할 수 있었겠는가? 동학혁명군의 참가자들과 자손들은 3.1 만세운동과 독립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범 등 광복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3.1 만세운동의 민족지도자 33인 중 손병희(동학 3대 교주)를 비롯한 8명이 동학혁명군 출신이고 민족지도자 백범 김구 역시 동학간부를 맡아 동학농민혁명에 직접 참여한 바 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헌장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우금치에서 1만5,000 동학혁명군들이 뿌린 피는 대한민국 정부 출범의 불씨가 됐다. 4.19 혁명과 5.18 광주민주항쟁, 6.10 민주항쟁, 촛불혁명 등의 정신적 뿌리가 동학농민혁명 정신이라는 점에서 동학혁명정신 계승을 헌법 전문에 명문화하는 것은 당연하다.

 무능한 조선왕조는 역사적 심판을 받았다. 그렇지만 일본군과 손잡고 동학혁명군의 씨를 말린 조선관군, 일부 양반과 민보군, 일제의 앞잡이로 활약한 보부상 등에 대한 응징과 단죄는 이뤄지지 않았다. 민족을 배신하고 일제와 결탁한 친일세력은 일제 식민통치 기간과 군사독재 정권 내내 국가권력의 요직을 독차지하거나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헌정질서를 유린했다.

 지금으로부터 125년전, 죽기를 각오하고 죽창 하나 들고 총탄이 빗발치는 우금치 고개를 내달렸던 동학혁명군들의 고귀한 정신을 떠받드는 것은 우리들의 당연한 책무다. 우리에게 남겨진 미룰 수 없는 3대 과제는 동학혁명정신 계승 헌법 전문 명시, 혁명 참여자 독립유공자 지정, 동학군 학살자 및 일제 부역자에 대한 역사적 단죄다.

 김종회<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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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중대 2019-07-13 16:24:24
??? 아니 19대대 2중대가 투입된 건 맞긴 한데, 애상초 애들은 동원예비군도 끝난 향토예비군 수준인 후비보병입니다. 최첨단 무기는 없었고, 무라타 소총에게 도태된 스나이더 소총만 들고온 방면에 관군이 주력이었습니다. 숫적으로 16배나 많았던 데다가 소총도 레밍턴이나 마우저 1871에 개틀링하고 크루포 야포도 다 조선군 측이었습니다.
신영규 2019-07-13 00:07:21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 한명이 죽었습니다.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1만5000:0. 이 아니라 1만 5000대 1입니다. 고종이 알량한 권력을 누리려고 일본군을 불러 들여 같은 민족을 잔인하게 학살했습니다. 천추의 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