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의 순환
혈액의 순환
  • 최정호
  • 승인 2019.07.1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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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을 정의하는 것은 어려울 뿐 아니라 그러한 노력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이 과학의 최신지견이다. 생명의 특징이라 규정되었던 대사, 번식, 진화 등과 같은 개념이 그다지 확실하지 않고 경계가 애매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 우리의 인지체계에 유용성이 있을 뿐 우주의 실체를 반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생명이란 개념은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칸트식으로 말하면 <생명>은 현상(appearance)일뿐 실제(reality)는 알 수 없다. 인터넷에서 스트랜드비스트(strandbeest)를 찾아보라. 네덜란드의 해변가에 전시된 테오 얀센의 작품이다.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었다는 작가의 말대로 이 작품이 마치 살아 있는 듯 느껴지며 우리는 기괴한 전율을 하게 된다.

 고대에서 중세를 거쳐 근대과학 혁명기에 생명현상, 특히 혈액순환에 대한 시각이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의 인식체계가 얼마나 가변적인가를 알게 해주며 이는 결국 현재 우리의 지식 기반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단편이 될 것이다.

 로마시대의 의사 갈레노스(A.D. 129-199)에 따르면 음식은 섭취된 후 간으로 가서 혈액으로 변하고(자연의 영)혈액은 폐에서 ‘공기’ 혹은 <생명의 영>과 합해져서 심장을 통해 각 기관으로 흘러들어 가는데 <뇌>에서 <동물의 영>을 받아 운동과 같은 생명활동을 하게 된다. 이러한 생리학은 기독교의 <영혼>교리와 잘 어울렸으며, 성서의 권위는 이 이론을 더욱 신성하게 만들었다. 이를 현대적 용어로 풀어본다면 섭취된 영양물은 정맥을 통해 간으로 가서 자연 혼의 작용으로 혈액으로 바뀌고, 음식물 중 필요없는 부분은 비장으로 갓 흑담즙이 된다. 간에서 나온 혈액은 심장의 우심실로 가는데 그곳에서 각 기관으로 운반된다. 이때 우심실에 전해진 혈액 일부는 우심실과 좌심실을 가로막는 격막의 구멍을 통해서 좌심실로 흘러들어 가 동맥으로 전해진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혈액은 심장으로 들어와 신체의 각 부분으로 운반된 후 모두 소모되어 버린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혼(魂) 개념을 발전시켜 당시의 지식과 정보를 종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628년 <심장의 운동에 관하여>라는 저서를 발간한 윌리엄 하비는 팔의 윗부분을 줄로 묶은 실험에서 피가 순환한다는 사실을 정량적으로 계산하여 증명하였다. 즉 갈레노스의 혈액파도설이 맞다면 인간의 피는 (한 번 박동할 때마다 나오는 피의 양)x(하루동안 박동 수) 만큼의 피가 심장에서 방출되어야 하는데 이를 계산하니 1800L 가 나왔고 이만큼 매일 만들어 낼 수 있음은 불가능하므로 모순임을 밝혀낸 것이다. 순환의 고리를 유추해내지 못한 자들은 그 혈액이 소모품처럼 사라진다는 쉬운 결론을 내렸으나 <측정>이 미덕이 된 17세기 과학 혁명기에 하비는 그 순환의 고리를 밝혀냈다. 사람체중의 몇배나 많은 엄청난 양의 혈액이 섭취된 음식물로 만들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결국 혈액은 심장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 것이다. 이러한 하비의 연구에는 선행된 선배들의 업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는데, 먼저 1543년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란 책을 출판한 베살리우스는 그 책에서 갈레노스가 주장했던 우심실과 좌심실 사이에 있어야 할 격막의 구멍이 없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같은 해에 출판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주장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란 책보다 더 영향력을 발휘한 베살리우스는 해부학의 아버지라 불리는데 그는 이 책에서 갈레누스의 오류를 300개 이상 지적하였다고 한다. 베살리우스와 동문수학한 스페인 출신 세르베투스는 우심실의 혈액이 격막구멍이 아닌 폐를 통하여 좌심실로 간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또 이 파도바 대학의 후배인 파브리키우스는 1603년 발표한 <정맥의 판막에 대하여>에서 정맥 속에 있는 판막이 혈액의 역류를 막아준다는 것을 알아냈다. 윌리엄 하비는 바로 이 파브리키우스의 제자이니 그의 위대한 발견으로 회자하는 혈액의 순환이론은 베살리우스 학맥의 전통에 직접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비는 격막의 구멍이 없음을 밝힌 베살리우스와 폐순환을 연역해낸 세르베투스, 정맥의 판막의 기능을 설명한 파브리키우스 그리고 그 스스로 밝혀낸 심장 내의 판막의 기능을 종합하여 혈액 순환이론을 세운 것이다. 피가 사라지지 않고 순환한다는 간단한 사실을 아는데 약 2-3천년이 걸렸다.

 최정호<대자인병원 성형외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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