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이름씨 째보선창과 뱅어
잊혀진 이름씨 째보선창과 뱅어
  • 이복웅
  • 승인 2019.07.08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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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말 대원군에 의해 만들어진 전라우도 군산진(1872년) 지도를 보면 금강의 강줄기 한 가닥이 죽성리(현 죽성동)의 서쪽 낮은 산 아래로 흘러 지금의 영광여고 산 아래까지 흘러 소(둠벙)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소는 옥구군청 신축 당시 매립되었다. 금강이 백마강 쪽으로 흐르다 갈라진 포구를 일컬어 째보선창이라고 한다. 또한 이곳을 부두라고도 하나 이는 근대식 선착장 시설로 상선이 들락거렸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쌀을 수탈해 가는 수단으로 항구를 만든 곳이 부두이다. 옛날에는 배가 닿는 곳을 포, 진, 나루라고 했다. 선창이라는 말은 물가에 다리처럼 만들어 배가 닿을 수 있게 한 곳을 말한다 부두는 선박이 계류하여 여객을 승·하선 시키거나 화물을 싣고 내리는 곳, 다시 말하면 근·현대식 선착장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허나 부두보다는 선창이라 부르면 비린내가 늘어붙은 갯바람이 불어오는 이웃의 훈훈한 얼굴 같은 느낌이 든다. 지도를 자세히 보면 군율, 송창, 개복에 있는 야트막한 산에서 모인 물줄기가 둠벙이 되었고 이어서 큰 내를 이루어 째보선창으로 흘렀다.

 째보선창은 일설에 의하면 옛날에 째보(언청이)라는 객주가 있었는데 그가 어업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래한 것이라 하기도 하고 째보라는 힘센 주먹이 있어 이 째보에게 자릿세를 상납해야 했다. 따라서 째보는 언제나 두려운 사람이었다 하여 째보가 있는 선창이라 부른대서 연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정학적으로 볼 때 금강의 강줄기가 강경 쪽으로 흐르다 선창의 안쪽으로 살짝 째저 흘러가는 지점에 선창이 있어 붙어진 이름이라 한다. 째보선창은 예사 갯끝까지 째진 것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움푹 팬 째보형이 만을 이루어 배를 대기가 좋았고 안전했다. 이 만은 어선의 대피소였으며 어지간한 폭풍이나 태풍에도 끄덕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어선의 규모가 작았으므로 군산 근해에서 고기잡이하는 어선은 거의 전부를 수용할 수 있는 넉넉하게 째진 만이었다 또한 시대를 풍자적으로 묘사한 채만식의 「탁류」에서 정주사가 서천땅을 팔은 돈으로 미두에 몽땅 날려 버리고 몇 번이고 물에 빠져 죽어 버릴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던 곳도 째보선창이다.

 째보선창의 공식명칭은 1933년 동빈어획물공동위탁판매소를 설립하여 이를 전북수산주식회사가 경영하다 1934년 군산어업조합에 넘기면서 동부어판장이 되었다. 일본인들은 째보선창을 어업기지로 개발하고 동빈어판장(하까시 하마)이라 했으며 지금의 서부어판장은 서빈어판장(니시 하마)이라 했다. 이 두 어판장은 일본이 행정적으로 장악해 어업의 이익을 모두 수탈해 가다시피 하였다.

 우리 어민들은 배를 타는 선원이거나 객주에게 돈을 빌려 어업을 하는 어업의 소작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금강 하구 군산 앞바다의 고기잡이는 진달래꽃이 필 무렵 뱅어잡이로 부터 시작된다. 뱅어는 봄철 입맛을 돋우는 좋은 수산물이다 또한 밤새 술로 어수선하게 흐트러진 속을 다스리는 술국으로 제격이었다. 겨우내 설치던 바다가 점차 안정돼 가면 어부들은 설레인다. 금강 역시 조용하고 잔잔하며 순하게 흐른다. 이 물 냄새를 따라 뱅어가 닥쳐온다 산란하려고 오는 것이다. 뱅어는 봄철 꽃 필 때를 맞춰 용케 째보선창 앞바다를 찾아와 산란한다 이때를 놓칠세라 어부들은 바빠진다 군산연안에서 거슬러 올라 나포, 웅포를 거처 강경입구까지 뱅어잡이가 형성된다. 소형어선 그물은 용수같이 생긴 중선망 양편에 그물을 내리고 흐름을 따라 들고 나는 뱅어떼를 잡는다. 그 모양새가 안경 같다 하여 안경배라고도 불렀다.

 뱅어잡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축제처럼 장관을 이룬다. 거의 강 하구를 메우다시피 많은 배가 모여들어 대군단을 이루었다. 뱅어는 어떻게 요리를 해 먹든 일미였고 담백한 맛이 꼭 이 고장 군산 사람들의 심성과도 같았다.

 1930년 후반에 건너편 장항에 제련소가 생겼다 그 후 고기잡이가 위축되기 시작하던 것이 일제 말엽 군산에 제지공장이 생기고 가이또 정미소 자리에 주정공장에 이어 화학공장이 연이어 생기더니 뱅어를 비롯한 연안 어종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이 째보선창은 일제 강점기의 뼈아픈 생채기를 안고 있는 군산사람들의 애환과 낭만이 삶의 질곡 속에 굳게 자리잡고 있으나 이제는 세월과 함께 매몰되어 그 자리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시멘트 건물만 우두커니 들어서 있어 옛모습은 오간 데가 없다.

 이복웅<사)군산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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