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런 우리의 역사, 남원 숙성령 전투의 가르침
자랑스런 우리의 역사, 남원 숙성령 전투의 가르침
  • 강용구
  • 승인 2019.07.07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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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 22일 남원에서 숙성령 전투에 대한 학술대회가 (사)사계문화유산연구소 주최로 열렸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임진왜란 때 벌어진 숙성령 전투에 대한 이해를 돕고 나라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던진 인물들을 밝히고, 전투의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마련된 자리이다. 숙성령은 남원 주천 장안리 방향에서 구례 산동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임진왜란(1592년)과 정유재란(1597년)은 가장 참혹했던 일본의 대조선 침략전쟁사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전투가 바로 남원의 숙성령 전투이다. 그러나 전투 사실 자체도 잘 모르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번 학술조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남원에서 있었던 전쟁의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부각시키고 각종 문헌 조사를 통해 숙성령 전투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호남의 중요성에 대해 <약무호남 시무국가> 즉 “호남이 없으면 국가가 없다”는 말로 강조한 바 있다. 남원 숙성령 전투의 가치가 바로 호남을 지켜낸 사실에 있다 할 것이다. 왜군이 처음 숙성령(1593.7.7)을 침범했을 때 조선군의 승리로 왜군은 남원으로 전진하지 못하게 되어 호남이 건재함으로 인해 조선은 최악의 사태를 모면하게 되었다. 이때 숙성령 전투에서 조선이 패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숙성령 전투가 호남을 지켜냈는가는 정유재란 당시 두 번째 숙성령을 넘은 왜군의 진로를 살펴보면 이해가 된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군 5만7천여명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은 숙성령보다 남원성 전투에 집중함으로써 민·관군 및 명군을 포함해 1만여명이 전사하였다. 반대로 남원성 공략에 성공한 왜군은 매우 빠르게 호남을 정벌하였고 도성으로의 진군로를 확보하였다. 왜군의 침략전쟁은 풍신수길의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 전쟁이 지속되었다면 조선은 슬픈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을지도 모른다.

 전통과 역사의 힘은 국가의 위기에서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일제 강점기, 독재정권, 6·25 전쟁으로 폐허되어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최초의 나라가 된 사실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약 430년전 자료를 찾아 우리 옛 선조들의 눈물과 고통, 피와 땀, 그리고 나라와 대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던진 희생정신을 찾아 기리고자 개최된 이번 학술대회는 더욱 큰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지속적인 사료 발굴, 일관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함은 물론 이러한 것들을 새로운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위스턴 처칠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한 자들은 그것을 반복하기 마련이다”고 하였다. 지난 정권에서 국민의 올바른 가치관과 판단을 흐리게 하고 온갖 불법과 탈법 등을 공공연하게 자행해온 부끄러운 정치를 우리 국민은 보고 경험한 바 있다. 그로 인해 국민은 더욱 현명해졌다. 정치인들이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왜군의 총·포에도 두려워하지 않던 의병의 기개와 기상을 되찾고 정의를 바로 세우며, 역사적·사회적인 책임 있는 존재, 행동하는 양심으로 거듭나야만 한다. 역사와 전통의 가르침을 겸허히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랑스런 우리 역사의 진실을 찾는 일이 계속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강용구(전북도의회 농산업경제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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