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23) 神話창조 2
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23) 神話창조 2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7.05 15: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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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리아나와 ABBA(아바)의 인기 대결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아바는 해체직전의 위기에 처해있어 공연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봐도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바와의 대결이 무산된 뒤인 1986년 말 우리들은 서독 뮌헨의 레인박팔리스라는 공연장에서 유럽일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모던 토킹그룹과 공연할 전기를 맞이했다.

 프로모터가 모던 토킹과 조인트 콘서트를 기획한 것으로 우리 형제들의 기량을 마음껏 뽑낼 절호의 찬스였던 것이다.

 그러나 웬일인지 개막시간이 다가와도 모던 토킹의 멤버들은 공연장에 도착하지를 않았다. 초조하게 개막시간을 기다리던 우리들에게 공연시작 10분을 남기고 전화연락이 왔다.

 모던 토킹이 공연장으로 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참가할 수 없다는 궁색스런 통고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코리아나와 무대에서 맞대결을 벌이면 절대 불리하다는 정보를 얻고 막판에 피해 버린 것이었다.

 1987년 2월의 일이었다. 우리들은 전년부터 새앨범을 취임하기 위해 준비하던 앨범의 마무리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영일형이 갑자기 서울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영문을 모르는 우리들에게 영일형은 코리아나가 전속된 음반사인 폴리그램 인터내셔널이 서울올림픽과 관련된 새로운 사업을 기획했는데 섭외 담당을 맡았다는 설명이었다.

 우리 멤버들은 레코드회사가 벌이는 사업이니만큼 서울올림픽과 관련한 음반을 만드는 일인 모양이라며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폴리그램 인터내셔널사는 1986년 2월 서울올림픽 공식가요와 음반제작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폴리그램 인터내셔널사에서는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1984년 LA올림픽이 반쪽올림픽이었던 만큼 서울올림픽과 관련한 음반을 제작하면 세계적인 관심을 끌것이라는 확신아래 세부적인 계획을 확정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영일형은 1987년 2월말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영일형은 폴리그램 인터내셔널사를 대신해 서울올림픽위원회 관계자들에게 서울올림픽 공식가요의 제작기획과 조건 등을 제시하며 협조를 부탁했다.

 서울올림픽위원회측에서는 대환영이었고, 영일형은 세부적인 마스터 플랜을 제시했다.

 폴리그램사에서 공식가요를 만들어 세계 각국의 조직망을 통해 보급하고 올림픽을 전후해 주최국인 한국을 홍보하며 500만달러의 예산을 확보했다는 내용이었다.

 폴리그램은 또한 이를 위해 각국 계열사들의 공동투자가 이루어졌으며 음반판매에 따른 일정 비율의 인세를 조직위에 지불하겠다는 것과 더불어 작곡가와 가수의 선정도 조직위의 선택에 맡기고 전 제작과정을 서울올림픽조직위와 사전 협의 한다는 부대조건도 내놓았다.

 그런데 당시 서울올림픽조직위에서는 일본의 소니레코드 홍보회사인 덴츠 등 여러 음반회사들의 비슷한 제의를 받고 있어 쉽게 결정 짓지를 못하고 있었다.

 결국 조직위에서는 여러 조건을 검토한 끝에 공식가요의 제작을 폴리그램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당시 세간의 소문과는 달리 폴리그램의 프로젝트가 어느 회사의 제안 보다 스케일이 크고 구체적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서울올림픽 공식가요 제작권을 위임받은 영일형은 3월말 다시 서울행 여객기에 몸을 실었다.

 공식가요의 작곡가를 결정짓기 위한 중요한 행차였다.

 <정리=서울 김순환 기자>  옮긴이 김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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