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그린 <이정웅 개인전>
책으로 그린 <이정웅 개인전>
  • 박인선
  • 승인 2019.06.30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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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acred grove-004 이정웅 作(Book+Mixed media, 2019)
The sacred grove-004 이정웅 作(Book+Mixed media, 2019)

 초록의 담쟁이가 건물을 감싸고 있다. 예술작품이다. 시선을 건물 꼭대기로 올려보니 담쟁이의 녹색 향연은 푸른 하늘과 맞닿았다. 청량감이 온몸으로 전해진다. 노출 콘크리트 기법으로 지어진 벽은 담쟁이의 손바닥을 잡아주기에 완성 맞춤이다. 절기마다 색다른 표정이다. 전주천변에 자리한 <우진문화공간>의 얼굴이다. 평일이라 전시관은 한가로웠다. 감상자에게는 이보다 호사스러울 수가 없다.

 6월이지만 여름은 벌써 깊어진 느낌이다. 열기가 무르익은 오후에 더위를 피할 곳으로 미술관을 찾는 모습이 즐겁다. 작품 감상은 혼자서 느린 마음으로 하는 것이 좋기도 하지만 선배와 함께 동행 감상을 하기로 했다. 입담이 좋은 선배는 친구 같으면서도 작업을 하는 동반자이고 때로는 조언자이다. 그래서 좋은 친구는 스승에 다름 아니라고 했던가.

 먼저 도착한 선배가 환한 미소로 반겨준다. 어느 전시장에서 보는 것 같은 작품들이다. 좀 더 시선을 가까이 들이밀자 질감이 느껴진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이 화면을 스친다. 올록볼록한 요철이 물성을 드러낸다. 노동의 흔적들이 뚜렷하다. 책으로 작업을 하는 <이정웅 개인전>이다. 책에 대한 매력에서 흠뻑 젖어 있다 보니 노동은 보람이었다고 한다. 16년 동안 같은 소재로 작업을 했다고 한다. 물아일체(物我一體)라는 의미가 떠올랐다.

 종이작업은 1900년대 초부터 서양미술에서 선보인 표현기법으로 현대미술의 방향을 제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미래주의와 다다이즘, 콜라주, 포토몽타주 등 표현방법들은 미술발전의 확장을 가져왔다. 정크아트 또한 이런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파생되었다. 작가가 소재를 새롭게 인식하면서 자기만의 색깔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지난해 집안 정리를 하다가 내놓은 책으로 작업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적이 있었다. 책을 쌓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리메이크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책의 무게에 질겁을 하고 말았다. 좋은 아이디어도 구체화되기까지는 시행착오가 따른다. 책의 무게가 철의 무게를 능가함을 알고 나서는 책으로 조형을 하려는 생각을 잠시 내려놓은 적이 있다.

 그래서 일까. 작가의 작품이 새롭게 느껴진다. 작품 이미지는 비정형의 형체들이 연결되어 나무가 되고 숲이 되었다. 숲 같지 않은 숲, 나무 같지 않은 나무, 단면의 책이 화면 가득 얼개를 이룬다. 책이 나무였던 것이, 숲이었던 것이 발견된다. 호모샤피엔스, 나무에 역사를 새기고 숲에 문명을 그린다. 책이라는 재료를 적극적으로 자기화시켰다.

 책에 대한 관찰은 흥미롭다. 시간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책이 있는가 하면 활자의 밀도에 따라 명암이 다르고 책의 성격에 따라 색깔이 있기도 했다. 책을 조형적으로 분석하고 해체하는 기술이 남다르다. 종이에 따라 부드러움과 딱딱한 질감이 표현된다. 칼날의 스침이 붓터치가 된다. 칼이 붓을 대신한 셈이다.

 전주는 종이의 고향이다. 전주 한지의 우수성을 논할 필요도 없을 만큼 독보적이다. 종이문화의 발달이 가져온 문화적 우수성은 공예 발전에도 한 몫을 하였다. 서예 예술의 본고장임을 자부한다. 책을 이용한 조형작업은 같은 문화의 맥락으로 이해된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작업이 돋보일 수밖에 없다.

 작가는 책으로 그리고 있다. 책이 변신하는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다. 서울에서도 작품전이 이어진다고 한다. 그들과의 만남도 설렐 것 같다. 미술관에 들어서면 모두에게 꿈을 꾸게 한다. 좋은 작가와의 만남은 관객으로서는 최고의 대우이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미술 교과서는 미술관이다’는 평소의 생각이 오늘따라 선명해진다.

 

 글 = 박인선(정크아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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