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21) 코리아나 胎動(태동)
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21) 코리아나 胎動(태동)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6.28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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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눈동자’가 유럽과 남미에서 히트를 기록하자 곳곳에서 공연 제의가 쇄도했다.

 ‘검은 눈동자’가 유럽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국내에서도 히트하자 귀국해 TV에 출연하고 공연을 열자는 제안이 곳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들도 서울로 당장 날아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의 유언을 생각하면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영일형도 “여기서 만족해선 안된다. 보다 더 세계적인 그룹으로 성장하자”며 우리들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었다. 대신에 우리들은 서울에서 된장과 고추장 등을 공수해다가 찌개와 국을 끓여먹고 김치를 담가 먹으며 향수를 달랬다.

 모든 음식의 조리는 솜씨가 뛰어난 형수(홍화자)가 도맡아 맛있는 한국음식을 만들어 주었다.

 형수는 우리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활동하면서도 새벽같이 일어나 우리들이 좋아하는 한국의 아침상을 마련해 주었다.

 특히 여기서 자랑하고 싱을 정도로 형수는 김치 담그는 솜씨가 빼어났다. 배추김치는 물론이고 총각김치, 깍두기, 나박김치 등 다양한 종류로 우리들의 구미를 맞췄다.

 형수의 이러한 김치맛은 소문이나 매니저 프랭크 퍼러, 프로듀서 빅터펠리의 가족들까지 김치맛을 알게돼 형수에게 김치 담그는 벗을 사사(?) 받아 담가 먹을 정도였다.

 해는 바뀌어 1979년. 아리랑싱어즈는 두번째 앨범 ‘Discorea’(디스코리아)를 발표했다.

 ‘디스코리아’는 한국출신의 그룹이 연주한 디스코 음악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디스코와 코리아를 합성해 만든 조어였다.

 앨범 ‘디스코리아’에는 홍신윤씨가 작곡한 ‘마더’ ‘저 하늘은 멀어도’ 외에 ‘It‘s Now or Never’ 등 대부분의 곡들은 롤프 소야라는 작곡가의 곡이었다.

 롤프소야는 ‘Yes I Can Bugi’ 등의 히트로 한국과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여성 듀오 바카라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장본인이었다.

 우리들은 앨범 ‘디스코리아’로 1979년을 넘기며 80년대를 맞았다.

 1979년 10월26일 박대통령의 서거 소직과 12월 12일 사태 등이 간간히 외신을 타고 들어왔지만 우리들에겐 머나먼 조국의 일이었다.

 대망의 1980년 아리랑싱어즈는 심기일전하며 세계적인 그룹으로 커나가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우리들은 롤프소야의 곡들을 소화하며 유럽 전역을 돌며 활동했다. 이때 또 한국에서의 귀국공연 요청이 쇄도했다. 한국의 양대 민영방송인 TBC-TV, MBC-TV 등에서 파격적인 대우를 보장하며 귀국공연 할 것을 제의했다. 특히 TBC에서는 황정태 국장이 현지에 왔다가 우리들의 음악성과 인기를 알고 초청했으나 끝내 거절했다.

 지금에와서야 생각하면 대단히 미안하기도 하고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81년 아리랑싱어즈는 인기와 더불어 서서히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 불화는 롤프소야의 곡을 취입한 이후로 계속 갈등을 노출시키더니 끝내 갈라서는 계기로 작용했다.

 결국 멤버들간의 작은 의견차가 세대차로 연결되면서 극복하지 못하고 홍신윤 씨와 안영희 씨의 탈퇴를 가져왔다.

 이때가 1982년 이라랑싱어즈의 쇠락을 가져온 것이었지만 코리아나의 태동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하여튼 두 멤버의 탈퇴로 해체위기를 맞은 아리랑싱어즈는 서둘러 멤버 보충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영일형은 이때 다시한번 특유의 수완을 발휘, 김규식 이명주 김유희 씨 등 3명의 새로운 멤버를 보충했다.

 그러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새 멤버를 보충했으니 그룹 이름을 바꾸자는 의견이 대두했다. 영일형과 멤버들은 각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정리=서울 김순환 기자>  옮긴이 김재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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