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상(像)
어머니상(像)
  • 이윤애
  • 승인 2019.06.25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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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여성계의 큰 별이 타계하셨다. 여성운동가이고 민주화운동가이며 평화운동가였던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다. 김대중 전대통령 부인으로 많이 알려졌으나 우리 사회에서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빛나는 삶으로 평가되었던 분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1세대 여성운동가로서 대한여자청년단 등을 창설했고 가족법 개정, 여성부 설립 등 평생 여성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여성지위 향상에 앞장섰다. 또한, 정치인 김대중 전대통령과 함께 민주주의를 위해 군부독재에 온몸으로 맞서 싸운 민주화 투사이기도 했다. 더 나아가 세계평화와 남북화해 및 협력을 위해 헌신한 평화의 전도사였다. 이분은 김 전대통령의 부인이기에 앞서 스스로 빛을 발한 분이다. 그동안 대통령 부인으로만 알던 시민들은 이 이사장의 타계소식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와 온라인에서 김대중 전대통령의 부인으로서 이희호 여사로만 가둬서는 안된다는 목소리를 냈다. 애도의 물결은 여성운동가, 민주화운동가, 평화운동가로 더 크게 자리매김하기를 염원했다.

 얼마전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젠 코카서스 3국을 여행했던 적이 있다. 고대신화와 전설이 흐르고 역사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성경 속 노아의 방주 전래지이기도 한 이들 국가는 1991년까지 소련연방국가였다. 아름다운 자연풍광과 이 땅을 탐하는 유린과 지배의 역사를 따라가면서도 세 나라 모두 국가수호의 상징물들이 여성이었던 점이 눈에 띄었다.

 아제르바이젠의 수도 바쿠에는 15세기 침입해 온 적장에게서 항복을 받아낸 전설이 깃든 소녀의 탑 ‘메이든타워’가 독보적으로 우뚝 세워져 있다. 타워가 여성지위에 영향을 미쳤다는 근거는 없었으나 이 나라는 이슬람국가임에도 여성들은 히잡을 두르지도 않았고 구습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옷차림새도 자유스러워 보였다.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도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위에 4세기에 축조된 나리칼라 요새가 있고 그 옆에는 ‘조지아 어머니상’이 있다. 왼손에는 와인잔을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손님이 오면 와인으로 대접하지만 적이 오면 칼로 무찌르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와인의 나라다운 자부심과 외세침략의 역사를 엿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 언덕에도 ‘아르메니아 어머니상’이 있다. 원래는 스탈린 동상이 있던 자리인데 아르메니아 병사들에 의해 파괴되고 그 자리에 받침대 포함 52m의 거대한 상이 세워졌다. 어머니상은 칼집에서 칼을 빼는 듯 넣는 듯 거대한 칼을 들고 도시 너머 터키국경을 노려보고 있다. 터키와의 아픈 역사로 지금은 평화시기이지만 언제라도 칼을 뽑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생뚱맞게 이들 나라의 어머니상을 소환하는 것은 우리도 어머니상을 서울의 남산 꼭대기쯤에 세우자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의 ‘어머니상(像)’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어머니상을 떠올려보면 ‘신사임당’정도이다. 신사임당은 시와 서화에 출중한 예술적 재능을 겸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로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서만 기억되고 있다. 학문과 효성, 덕행을 겸비하여 한국여성의 표상으로 간주하는 신사임당의 얼을 기리고자 ‘신사임당 상(賞)’도 제정하여 수여하고도 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5만원권 지폐에도 신사임당 얼굴이 그려져 있다. 신사임당은 21세기 여성상을 대표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정되는 과정에서 갑론을박이 오고 가기도 했다.

 그렇다면 신사임당이 한국의 어머니상 표상으로서 충분한가? 사임당 자신은 딸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자기주도적인 삶을 산 것은 분명하나 다른 여성들의 삶도 주체적으로 살 수 있도록 지지하고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근거는 찾지 못했다. 혹여 우리도 ‘한국의 어머니상(像)’을 갖고 싶다면 자신의 삶에서 빛을 발하고 다른 여성들의 삶도 바꾸어 낸 이희호 이사장의 모습이라면 될까?

 이윤애<전북여성교육문화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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