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시 만경공원, 고려문하시중 두경승 장군 사적비 건립
김제시 만경공원, 고려문하시중 두경승 장군 사적비 건립
  • 이방희 기자
  • 승인 2019.06.2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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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김제출신으로 고려시대 문하시중을 지낸 두경승장군의 위국충절(爲國忠節)과 무인정신,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愛民)정신을 기리기 위해 두경승 장군 사적비 제막식이 22일 김제시 만경읍 만경공원에서 열렸다.

  두 장군의 출생지 이자 고향인 만경읍 만경리 336번지에 세워진 사적비는 기단이 0,6m, 비석 3.4m 총 높이 4m로 올해 3월에 공사를 시작해 6월에 완료했다.

 이날 행사에는 김종진 전 문화재청장, 두세훈 전북도의원, 유진우 김제시의원, 두재균 전 전북대학교 총장, 두하영 전북과학대학교 교수, 두릉두씨(杜陵杜氏) 종인 등 100여 명이 참석했으며, 두진천 사적비추진위원장의 경과보고에 이어 두봉신 두릉두씨 종친회장의 기념사가 있었으며, 김종진 전 문화재청장, 두세훈 전라북도의원, 유진우 김제시의원의 축사가 있었다.

  두 장군은 전라도 만경현 (현 김제시 만경읍)출신으로 1173년(명종3) 김보당 난과 1174년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난에 뛰어난 무공(武功)을 발휘하여 진압하였고, 여진족의 침입은 회유로써 물리쳤으며, 무인시대에 대표적인 문신들과 함께 유교정치 이념에 입각하여 개혁시책을 추진한 중요인물로 알려졌다. 국난 평정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백성을 사랑한 애민(愛民)정신과 무인의 정도를 걸은 표상(表象)은 우리민족사에서 후세 무장(武將)의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사료에 따르면 장군은 우리고장 전주 만경현(萬頃縣)에서 평장사(平章事) 벼슬을 지낸 두방(杜邦)의 아들로 태어나, 무용이 출중하여 의종(毅宗) 때 후덕전(厚德殿)의 견룡(牽龍)이 되었고, 명종 초에 내순검지유(內巡檢指諭)를 거쳐 낭장(郞將)이 되었다. 1173년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로 김보당(金甫當)의 난을 평정한 후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가 되었다. 이듬해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반란을 일으키자, 동로가발(東路加發) 병마부사로 후군총관(後軍摠管)으로 난을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이 된 뒤 문하시중(門下侍中)·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1197년 정권을 잡은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자연도(紫燕島)에 유배되자 울분으로 피를 토하고 죽었다.

  장군은 최충헌의 독제체제 수립과정에서는 불의(不義)에 굴하지 않고 임금에게 충의(忠義)을 다 바친 무장이다. 최근에 KBS 대하드라마 무인시대 방영(放映)으로 장군의 애국충절(忠節)과 용맹한 상무정신(尙武精神)이 널리 국민들에게 각인되어 알려졌다.

 두릉두씨 종친회 두봉신회장은 “장군의 탄생지인 김제시 만경읍 두릉(杜陵)에 종친들의 정성스런 성금을 통해, 오랜 숙원(宿願)사업인 사적비를 세우게 되어 후손으로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김종진 전 문화재청장은 축사에서 “충효사상이 상실되어가는 현대사회에서 우리역사에 명장인 두경승장군의 위국충절(爲國忠節)과 애민정신(愛民精神), 투철한 군인정신(軍人精神)을 이어받고 높이기리기 위해 장군의 고향에 사적비를 세우게 되어, 반갑고 기쁜 마음이다”고 소감을 말했다.

 이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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