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19) 아리랑싱어즈 탄생
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19) 아리랑싱어즈 탄생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6.20 20: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재원형과 강혜숙씨의 건강문제는 ’파이브핑거스’에게 새로운 국면을 전개시켰다.

 다섯손가락이 세손가락이 되었으니 나, 용규, 형수만으로는 그룹을 계속 지탱해 가기에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영일형은 고심끝에 가족회의를 소집, 그룹을 해체할 것인가, 계속 이끌고 갈것인가를 논의했지만 묘책이 없었다.

 이런저런 궁리끝에 서독에서 활동하고 있는 막내 애숙을 데려오자는 얘기가 오갔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애숙은 이미 현지의 CBS레코드에 전속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영일형은 연일 고민하던 끝에 형수의 친정형제들과 합쳐 새로운 그룹을 만드는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당시 형수의 친정오빠이며 우리 형제에게 음악을 가르쳐준 홍신윤씨의 부인 안영희씨, 남동생 홍윤식씨 등과 싱가포르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영일형의 기막힌 묘안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생 홍윤시그, 부인 안영희씨와 함께 트리오로 활동하던 홍신윤씨는 마침 유럽진출을 모색하고 있었다며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이렇게해서 코리아나의 전신인 ’아리랑싱어즈’가 탄생되었다.

 6인조로 구성된 아리랑싱어즈는 기타 이승규, 드럼 이용규, 베이스 홍화자, 키보드 홍신윤, 홍윤식, 베이스 안영희로 음악적 기반을 어느팀보다 탄탄하게 다졌다.

 특히 멤버 모두가 각자 맡은 악기외에도 서너가지 이상의 악기를 연주할 능력을 갖춘데다 우리나라의 고전무용인 부채춤, 장구춤 등까지 익혔으니 ’아리랑싱어즈’는 그야말로 무대에 꽉찬 그것이었다.

 더군다나 금상첨화격으로 편곡과 작곡, 연주에 발군의 실력을 갖춘 홍신윤씨가 그룹에 직접 참여한 것은 아리랑싱어즈에 중량감을 더했다. 당시 홍신윤씨는 뛰어난 편곡솜씨로 ’아렌지홍’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막강 멤버로 진용을 짠 아리랑싱어즈는 1977년 초 유럽 최고의 무대에 서는 계기를 잡은 한편, 스위스 최대의 레코드사인 폴리돌과 전속계약을 맺는 행운을 얻었다.

 폴리돌과의 계약에는 영일형의 공이 컸다. 현지 매니저역할을 한 프랭크 피러씨와 폴리돌사의 프로듀서 빅터 펠리의 친분을 활용, 의외로 쉽게 계약을 체결했다.

 아리랑싱어즈는 폴리돌과의 계약과 함께 첫 데뷔곡으로 한국인의 정서가 듬뿍담긴 민요 ’아리랑’으로 정했다.

 민요 ’아리랑’에 영어가사를 붙이고 록비트의 리듬으로 편곡, ’송 오브 아리랑’이라는 타이틀로 녹음에 들어갔다.

 결국 이 노래는 우리들이 무대에 오를때마다 연주해 아리랑싱어즈의 간판노래가 돼 스위스를 비롯한 프랑스 등 유럽 전역에서 대히트 했다.

 우리들은 이 노래를 계기로 스위스의 TV에 출연했고, 계속해서 두번째 싱글 ’난 로큰롤 뮤직을 좋아해’를 발표했다. 이 노래는 ’송 오브 아리랑’보다 더 큰 반향을 일으키며 스위스와 서독의 가요차트 20위권에 올랐다.

 두 노래가 예상치 않는 인기를 얻자 폴리돌사는 우리들을 전속시키며 전속테뷔앨범의 녹음을 재촉했다.

 처음에는 아시아 출신의 작은 그룹으로 회의에 찬 반응을 보이던 폴리돌사가 아리랑싱어즈의 프로모션에 본격적으로 나설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이때부터 이리랑싱어즈의 무대는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정리=서울 김순환기자>  옮긴이 김재춘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