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다 떠난 자리
머물다 떠난 자리
  • 김동수
  • 승인 2019.06.19 16: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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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지방 선거에서 낙선한 경기도 모 시장이 퇴임하면서 아파트 관사에 있던 비품을 자신의 집으로 가져간 일이 있었다. 이들 비품은 시 예산으로 구입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 시장은 퇴임 직후 관사를 비우면서 장롱, 가죽의자, 카펫 등 집기부터 드럼세탁기, 비데 그리고 다리미까지 가져갔다고 한다. 이들 비품은 자신이 시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에 구입한 것이기에 시 관계자는 그 시장에게 공문을 발송해 환수에 나설 방침이라고 했다.

 재임 중 구입했던 집기와 가구들을 그대로 두고 가는 게 상식이고 원칙이다. 청소는 물론 도배까지 해 주고 가기도 한다. 그것이 후임자에 대한 예의요 도리다. 지방자치장들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단체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일이다. 전임자로부터 물려받은 예금통장을 다 써버리고 빈 통장으로 넘겨주는 이들도 있지만, 물려받은 금액보다 증액하여 넘겨주는 이들도 있다. 사람에 따라 앉았다 떠난 자리에서 미담의 향기가 피어나는가 하면, 비난과 추문으로 남의 입줄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임기를 마치고 백악관을 떠나던 날, 백악관에서 정거장까지 걸어가겠다고 했다. 이젠 공인이 아니라 사인(私人)이기 때문이다.

 노자 <<도덕경>>에 ‘길을 잘 가는 사람은 바퀴자국을 남기지 않는다’(善行無轍迹)고 했다. 뒷담화가 뒤따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젊은 시절 보이스카우트 훈련 교육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그때 교관으로부터 ‘보이스카우트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말을 배웠다. 이 말을 지금껏 내 삶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수많은 대원들이 숲속에서 야영을 하고 머물다 가더라도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군대나 보이스카우트의 기본 수칙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경건한 마음가짐과 신사도 정신이 아닌가 한다.

 중학교 시절 즐겨 읊던 시에 유치환의 「춘신春信-봄소식」이 있었다. 따뜻한 봄날이면 마을 뒷동산에 올라 이 시를 읊으며 ‘앉았다 떠난 멧새’의 여운을 마음에 담아 존재의 무상함과 내 삶의 자세를 생각해 보곤 하였다.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에서 작은 깃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 가지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 유치환 「춘신(春信)」

 봄날 꽃그늘 가지 사이로 멧새 하나 찾아와 놀다 떠난 그 자리가 ‘아쉽게도 한들거리’고 있다고 한다. 떠나간 멧새의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용이 새벽에 동천으로 돌아갔으나 구름이 아직도 젖어 있고

 용귀효동 운유습(龍歸曉洞 雲猶濕)

 사향이 봄산을 지나가니 풀들이 절로 향기가 나네.

 사과춘산초자향(麝過春山 草自香)

 율곡 선생이 어려서 꿈에 상제(上帝)를 뵙고 금으로 된 족자 하나를 받고 열어보았더니, 위와 같은 시구가 있었다고 한다. 용이 구름을 타고 놀다 지나가고, 봄날 사향노루가 지나가는 하늘과 골짜기에는 구름이 아직도 촉촉하게 젖어 있고, 풀들이 스스로 향기롭다는 말이다. 이처럼 훌륭한 인물들이 지나간 뒷자리에는 언제나 상서로운 기운이 남아 그들의 행적과 명성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날도 관리나 단체장들이 부임할 때 선배나 친지들이 율곡의 이 시 ‘사과춘산초자향(麝過春山草自香)을 액자에 새겨 선물하면서 귀감으로 삼으라 한다.

 김동수<시인/온글문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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