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18) 유럽행 특급 2
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18) 유럽행 특급 2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6.18 09: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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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카이로를 떠나 첫발을 내디딘 곳은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해변휴양도시 디에프시였다.

 이곳은 2차세계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끌게했던 노르망디상륙작전으로 유명한 전략거점도시로 당시 캐나다병사들이 가장 많이 전사했던 곳이라고 했다. 이런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캐나다 국기가 언제나 게양되고 있었고, 캐나다에서 온 사람들은 누구나 칙사대접을 받는 독특한 도시이기도 했다.

 우리들은 유럽의 첫생활을 이곳 디에프시에서 익히며 약 4개월동안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다시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디봉시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우리들이 디봉시에서 오른 무대는 카지노 디봉의 나이트클럽이었는데 이곳은 프랑스의 땅이었지만 스위스의 제네바 시와 인접해 프랑스 사람들보다 스위스인 관광객들이 더많은 특이한 지방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무대에 오른 첫날부터 새로운 장벽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관객들이 요규하는 음악이 중동이나 동남아에서 공연했던 것과 전혀 딴판이었기 때문이었다.

 동남아나 중동에서는 미국음악이 주류를 이뤘지만 이곳에서는 미국취향의 음악으로는 관심을 글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또 설상가상으로 언어의 벽에 부딪쳤다. 동남아, 중동에서의 공연때만해도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지만 프랑스에서는 불어를 배우지 않고는 인기가 불가능할 것 같았다.

 더구나 음악과 언어외에도 생활습관과 음식이 판이해 적응하기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우리들의 이런 상황에서 가장 위안이 돼준 분은 형수 홍화자 씨였다. 형수는 뛰어난 음식솜씨로 김치도 담그고 여러가지 한국음식을 마련해 주면서 우리들을 위로해 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동남아, 중동에서보다 자주 조국에 대한 향수병에 빠져들곤 했다.

 우리들은 이러한 슬럼프에서 헤어나기 위해 몸부림 치다시피 했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문제는 미국식 음악을 버리고 유럽식 음악을 익히는 것이었다. 그러기위해서는 많은 유럽음악을 듣고 새로운 레퍼토리를 개발하는 길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언제나 라디오를 들고 다니며 노래를 듣고, 레코드가게를 극성스럽게 드나들며 유럽음반들을 모았다.

 영일형은 특히 근처의 도시에서 유명가수나 그룹들의 콘서트가 열리면 입장권을 구해 필히 관람하도록 했다. 여기에 우리들도 뒤질세라 기회만 생기면 유명그룹이 출연하는 나이트클럽 등을 시도때도없이 쫓아 다니느라 돈푼깨나 썼다.

 우리들이 유럽식 음악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던 1976년 9월 다시 기회는 찾아오고 있었다. 스위스에 있는 연예에이전트에 발탁된 것이다.

 우리들은 스위스의 아라우 호프호텔과 계약을 맺고 활동 근거지를 스위스로 옮겼다.

 스위스 시험무대에서 평가받은 우리들은 그해 겨울에는 스키의 고장 다보스와 상모리스 등을 오가며 활동을 벌였다.

 그러는사이 처음엔 어딘가 어색해 보이고 이질적인 동양인의 무대도 제법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적응하기에 정말 곤혹스러웠던 음식과 생활습관도 익숙해지며 우리의 음악에 열광하는 팬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정리=서울 김순환 기자>  옮긴이 김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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