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정치의 복원
타협정치의 복원
  • 채수찬
  • 승인 2019.06.17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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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호 여사 빈소에 다녀왔다.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접고, 민주투사였던 그리고 대통령이었던 김대중 선생의 평생 동지이자 반려자로서 의미 있는 길을 가신 분이다. 어려울 때나 권좌에 있을 때나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지도자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던 지혜 있는 분이었다. 필자는 오다가다 인사만 했을 뿐 여사와 대화하며 본인의 생각을 직접 들어본 적이 없어 지나고 보니 아쉽다. 훌륭한 삶을 사셨으므로 유족들에게 위로와 축하를 함께 드린다.

 이희호 여사의 빈소에는 동교동에 뿌리를 둔 정치인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젊은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연로하신 분들이다. 그분들을 보면서 이제 한 시대가 지나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 중에는 젊은 시절 고생 많이 하고, 감옥도 다녀오고, 정치하느라 집안 한 살림 거덜내고, 지금은 그리 풍요롭지 못하게 지내시는 분들이 많다. 그들이 지난날의 동지들과 함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경험한 얘기들을 나누며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그분들 대화의 주제는 역시 정치였다. 그런데 그분들이 말하는 정치는 요즘의 정치 현실과는 많이 달랐다. 정치는 싸움이지만 이들의 얘기는 어떻게 이겼느냐는 것보다는 어떻게 싸움을 타협으로 마무리했느냐 하는 무용담이 주였다. “우리 때는 싸울 때는 싸우더라도 서로 만나서 친하게들 지냈는데, 요즘은 ‘저놈들과는 대화가 안돼’하는 식이더구먼….” 하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분들도 있었다.

 특정한 이슈들을 놓고 내가 옳고 상대방이 그르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모든 사안에서 내가 옳고 상대방은 그르다고 생각하는 접근법은 문제가 있다.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에서 정치는 타협이다. 타협이 없으면 정치도 없다. 그리고 보니 지금 이 순간에도 국회가 상당기간 열리지 못하고 있다. 정치가 실종된 것이다.

 정치가 실종된 것은 우리나라뿐이 아니다. 영국 정치도 브렉시트 이슈에 타협안을 도출하지 못하여 헤메고 있다. 미국도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를 둘러싸고 국론이 극도로 분열되어 있다. 다른 대다수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 러시아, 북한 등 원래 민주주의 전통이 없는 곳의 정치는 다른 이슈이므로 여기서 얘기하지 않기로 한다.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정치가 실종된 원인은 사회의 양극화에서 찾을 수 있다. 정치는 그 사회에 현존하는 역학관계를 그대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로써 설명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이는 정치의 일면만을 본 것이다. 정치는 한 사회 세력균형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한 사회를 이끌고 가는 기능도 있다. 혁명가와 투사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정치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타협안을 도출해내면 그 사회는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런 정치인들이 있는 사회에는 혁명가와 투사들이 필요 없다. 반대로 정치가 작동하지 않으면 그 사회는 지그재그로 양극단을 오가는 불안정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럼 왜 정치인들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가? 왜 타협의 정치인들이 도태되고 있는가? 이는 심각한 문제인데 필자도 정확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정당제도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고, 공직자 선출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정보가 노출되는 극도로 투명한 사회가 되면서 정상적인 사람들은 정치에 들어가기를 꺼리고, 온갖 공격에 견딜 수 있는 낯두꺼운 사람들만 정치하게 돼서 그렇게 되는 건지. 아무튼 입장을 달리하는 정치인들이 서로 친구가 되어 함께 나랏일을 논의해나가는 모습은 어디서나 보기 힘들게 되었다.

 대의민주주의 성공은 정치인들에게 달렸다. 정치인들이 전문가일 필요는 없다. 정치인들이 도덕군자일 필요도 없다. 정치인들에게 필수적인 것은 자신의 입장과 상대방의 입장을 조화시켜 타협할 수 있는 능력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동교동 정치인들이 무용담을 들으며 어떻게 하면 타협 정치의 복원될 수 있을지 고민해보았다.

 채수찬<경제학자/카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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