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인연
잊을 수 없는 인연
  • 박인선
  • 승인 2019.06.16 13: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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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k Art:Bull-17A 박인선 作/노인이 수거한 자동차폐기물로 만든 작품
Junk Art:Bull-17A 박인선 作/노인이 수거한 자동차폐기물로 만든 작품

 정크아트의 시작은 우연찮게 팔복동 산업단지의 후미진 골목을 지나다가 폐 엔진을 분해하고 쌓아 놓은 부품들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호기심이 발동하면서 뜻밖에 많은 부품들을 챙겨 올 수가 있었다. 돈 한 푼 받지 않은 정비공장 주인의 고마움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이렇게 시작한 작업은, 훗날 지금의 고물상에 작업공간을 만들게 된 동기가 되었다.

 초창기 작업은 폐 생활용기들이 주재료로 사용했다. 생활 폐기물들은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우리에게서 지울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작업의 방향은 산업폐기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고물상 폐기물 더미에서 발견한 폐 자동차 부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부터 무겁고 덩어리가 큰 폐기물들이 작업공간을 차지했다.

 어느 날, 낡은 소형 화물트럭에 가득 실어진 자동차 폐기물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머리가 백발인 노인이 트럭에서 내렸다. 누군가의 수고로움으로 작품의 재료들이 고물 더미를 차곡차곡 쌓이는 것에 감사할 때쯤이었다. 그때까지도 자원의 순환이라는 흐름으로 인식하고만 있었다. 뜻밖에 작품 재료들이 노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을 때, 폐기물은 누군가의 소중한 노동의 생산물이고 생존으로 비쳤다.

 그때, 첫 만남은 낯설기만 했다. 이례적인 인사가 고작이었다. 몇 번의 만남이 있고 난 후, 노인은 자신이 수거한 폐기물들이 정크아트 작품 재료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작업장을 방문하고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듣던 얼굴에서 행복한 미소가 베어났다.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었다. 폐기물들은 자동차 정비업소에서 뒷정리를 해주고 수거해 온다. 노인에게는 생계수단이었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작품을 보면 수백 대의 텔레비전이 연결되어 나오는 작품이 있다.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작품이라지만 상상력을 뒷받침하는 기술적 지원이 없었다면 오늘의 그가 었었을까, 백남준의 명성 뒤에 숱한 세월을 묵묵히 지켜준 이름 모를 엔지니어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을 것이다.

 뉴욕 전시회 오프닝 자리에서 백남준은 그의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헌신해온 전속 엔지니어 이정성씨를 소개했다고 한다. 작가가 죽고 난 훗날, 그의 입을 통해 “백남준 작가와 작업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행복했다”라는 소회로 자신을 인정해준 작가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작가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서로에게 이름 없는 고마운 존재들이 있게 마련이다.

 늦가을 어느 날, 자동차 폐기물을 실어야 할 트럭에 정비업소에서 버려진 폐목재들을 가득 싣고 환한 모습으로 작업장으로 들어왔다. 자동차부속을 포장했던 목재박스들이었다. 난로용 땔감으로 쓰기에는 그만이었다. 뜻밖에 겨울준비를 쉽게 할 수 있었다. 고마움에 수고비를 건넸지만 자동차 기름 값만 받겠다며 나머지는 돌려주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들던 고물상에 노인의 발길이 끊겼다. 할머니를 한 해전에 저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외로움의 그림자가 커 보였었다. 전화기의 벨소리도 멎어 있었다. 따뜻한 밥 한 끼라도 함께 했으면 좋으련만 기다림의 시간이 갈수록 불길한 마음이 찾아왔다. “어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재주가 너무 좋소.” 정크아트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무한 응원을 보냈던 노인의 모습이 더욱 그립다. 잊을 수 없는 좋은 인연이었다.
 

 글 = 박인선(정크아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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