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사이드의 질문
에드워드 사이드의 질문
  • 장상록
  • 승인 2019.06.12 14:5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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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경계인이었던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는 본인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서구와 아랍 양 진영에서 소외되는 삶을 살았다. 서구인들은 사이드라는 성이 서구와 이질적이라 얘기했지만 정작 아랍인들은 그의 이름 에드워드가 아랍적이지 않다고 비난했다. 그가 [오리엔탈리즘]에서 전달 하고자 했던 중요한 메시지도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변증법적 해결노력이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한국에 왔을 때 투숙한 호텔엔 사무엘 헌팅턴도 함께 있었다. 그는 동행한 서울대 교수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사무엘 헌팅턴이 한국을 얼마나 무시하는지는 알고 그를 초청한 것입니까?”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에서 분류한 문명권에 한국은 존재감이 없다.

  중국과 일본이 독자적 문명권으로 분류된 것과 비교하면 한국은 중국의 아류 문명으로 치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조롱하고 폄하하는 사람을 초청해 환대하는 모습은 분명 어색하다.

  그것은 원조 혐한론자인 소동파(蘇東坡)를 짝사랑했던 고려와 고려 지식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사이드는 서울대 교수에게 한 가지를 더 물었다고 한다. “왜 한국인은 일본제국에 대해서는 그토록 분노하면서 중국제국이 한국사에 끼친 고통과 해악에 대해선 침묵하나요?”

  공녀에서 환향녀에 이르는 한국 여인 잔혹사가 위안부에 비해 가벼워서인가? 수천년 동안 굴종을 강요하고 억압한 것은 왕조적 유산이라고 치부하자. 6·25당시 불법 월경해 국토를 유린하고 분단을 고착화시킨 전쟁책임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는 과연 어떤 대응을 했던가?

  한국이 일본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한 것에 대해 마땅히 분노하고 현재와 미래의 경계로 삼아야 한다. 다만 당시 청과 러시아는 물론 미국도 조선의 선한 이웃은 아니었다. 영토적 야심이 없던 미국과 달리 청과 러시아가 조선에 대해 가졌던 제국주의적 접근 방식은 일본과 다르지 않다.

  청과 러시아는 단지 선하지 않은 약자의 위치에 있었을 뿐이다. 동북공정은 물론 중국몽을 외치며 발호하는 중화주의의 망령을 보면서 신장과 티벳을 생각하게 되는 것도 연원은 다르지 않다.

  또한 연해주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킨 스탈린의 민족 이주 정책은 소련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한반도에서만 예외였을 거라는 추론이 얼마나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

  세상엔 선하지 않은 약자와 악하지 않은 강자가 있다. 물론 그것이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를 견제해야하는 사회적 의무와 도덕적 정당성을 희석하는 논리가 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현상에 대한 진단과 미래에 대한 전망에 있어서 사람과 사안에 대한 객관성이 모호한 감성에 의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악하지 않은 강자에 대해 우리는 무심하면 된다. 하지만 선하지 않은 약자를 바라보는 인식은 신중해야 한다. 아울러 그들과의 공존을 위해 사회와 국가가 마땅히 찾아야 할 사회적 합의의 도덕적 기반과 현실적 대안에 대해 답해야 한다.

  미국인, 일본인, 중국인, 러시아인 모두 내 친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미국, 일본, 중국 그리고 러시아 모두가 한국의 친구가 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민족과 자주 그리고 민주주의. 과연 그것에 부합하는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이웃은 어디인가?

 구한말 선하지 않은 약자였던 중국은 현 시점에서 강자의 대접을 원하고 있다. 어쩌면 그들의 바람처럼 중국몽이 실현되어 강자가 될지도 모른다. 우려되는 것은 일개 삼류 관료출신 대사가 주재국과 그 국민들을 향해 총독행세를 하려는 망동을 보이는 것에 대응하는 한국정부의 방식이다.

 과연 중국이 선하지 않은 약자에서 악하지 않은 강자로 변신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중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의 모습은 어떤 세계가 될까.

  중국은 큰 나라이고 자신들은 중화라고?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베스트팔렌 조약과 마르크스 공부부터 다시 해야 한다.

  한국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에드워드 사이드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악하지 않은 강자가 선하지 않은 약자보다 낫다.

 장상록<예산군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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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 2019-06-19 19:47:28
선하지 않은 약자라는 어구를 보며

역사적 논란거리를 두고 망각하는 세태에 대해서
과연 어느 누가쉽게 정의로움에 대하여 판단을 내리고,
정당한 비판과 실천을 행동에 옮기는 이가 있을것인 가란 생각을 돌이켜 보게 됩니다.

비단 스스로만을 돌이켜 보기에도 부족함과 씁쓸한 부끄러움을 갖게 되는 저 본인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과오에 대한 반성과 경각심을 일깨우기엔 좋은 글 인듯 합니다. 생각에 있어 조급하면 실수가 나기 마련인 듯 아직 어리다면 어린, 나이에 제게는 생각하는 이들은 깨우치되, 부디 과한 감정으로 역사적 사실을 두고 그릇된 선입견을 갖기보다는 좀 더 숙고하여 분명한 판단과 주관을 세우는 시간으로 말미암아 선례의 부족을 훗날 더 장대한 방벽과 신념의 기틀을 조성 하는 것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