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가 된 의병장 임병찬 묘소
폐허가 된 의병장 임병찬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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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6.11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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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병장 임병찬은 군산시 옥구면 상평리 광활마을(당시 옥구군 서면 상평리)에서 태어났다.

▼ 4살 때 천자문을 읽을 정도로 총명했다. 17세에 옥구 형방을 시작으로 전주감영의 예방.공방. 호장등을 거쳐 30대 후반 나이에 낙안군수와 순천진 절제사등을 엮임했다.

▼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임병찬 의병장은 결사대를 조직 일본 고위층과 조약 파기 담판을 지을 계획이었으나 최익현의 만류로 계획을 접고 무성서원 봉기를 일으킨다. 임병찬 의병장은 최익현과 주도하여 일본이 저지른 만행 중 16개항의 죄질을 성토한다. 주요 내용을 보면 갑신정변을 일으킨 죄.을미년 명성황후 시해 죄.애국단체 탄압죄.이권.토지 침탈 점령 죄등이다.

▼ 임병찬 의병장은 정읍.태인.순창.곡성지역을 돌면서 모병한 3천여명의 의병들을 이끌고 담양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치룬다. 아쉽게도 일본군에 붙잡혀 거문도로 유배되고 2년후 풀려난다.1914년 고종은 전국적으로 흩어져있는 의병들을 조직화 하기위해 임병찬 장군을 종2품 가선대부로 삼아 전남북지역(제주도지역포함)순무대장에 임명하고 밀지를 보내 의병을 군사체제로 조직화하여 항일투쟁에 나서도록 한다.

▼ "대한독립의군부"로 재조직 일제 내각과 총독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내는 등 항일의병운동을 펼치다 그해 5월 일본군에 체포돼 거문도에서 순절하고 있다. 그러나 순창 회문산(837m)정상에 있는 고인의 무덤은 후손들이 제도로 돌보지 않아 잡초만 우거져 있고 무덤 지붕석은 멀리 버려져 있으며 폐허가 된 채 방치 돼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한 충의로운 죽음이 헛되지 않아야 한다. 오는 25일(음5월23일)이 그의 103주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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