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16) 테헤란의 헤프닝 2
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16) 테헤란의 헤프닝 2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6.11 10: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효창동 공원놀이터에서 용규, 어머니와 함께 뒤편이 필자.

 “박 대통령이 죽긴 왜 죽었냐! 金日成이가 죽었지”하며 우리 응원단의 교포 한 분이 확성기로 소리쳤다.

 그러자 북한 여자배구선수들은 염치불구하고 팔뚝질까지 하면서 온갖 욕설을 퍼부어 댔다. 헤프닝이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슬픈 현실이었다.

 결국 첫 南北대결이 된 여자배구는 남한팀의 일방적인 경기로 세트스코어 3대0 스트레이트승을 거두었다.

 우리 선수들과 응원단은 북과 징을 두드리며 승리의 환호성을 질렀지만 북한팀은 고개를 숙인채 쓸쓸히 퇴장하고 있었다. 개운치 못한 뒷맛만 남긴 채….

 테헤란아시안게임의 첫 남북대결의 승리로 불붙은 교민들의 응원열기는 중국과의 남자농구경기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한국남자농구팀은 중국의 장신숲에 가려 패색이 짙던 게임을 경기 중반 중거리슛을 연속 성공시키며 점수차를 1점차로 좁혔다.

 그리고 경기종료 3초를 남기고 자유투 2개를 얻는데 성공했다. 2개 모두 성공시키면 극적인 역전승을 거둘 수 있는 드라마틱한 찬스를 잡었던 것이다.

 자유투를 던지는 순간 경기장은 일순 긴장감으로 모두들 숨을 죽였다. 하지만 결과는 자유투 1개가 불발, 무승부로 끝났다.

 잠시후 시작된 연장전에서 우리팀은 신장과 체력의 열세에도 불구 두골 반차 역전승, 교민들을 열광시켰다.

 우리 응원단은 서로 얼싸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테헤란아시안게임은 일본, 이란, 중국의 독무대로 한국은 4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우리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선수단을 돌아 다니며 응원전을 벌였다. 우리 형제들은 테헤란 대회를 계기로 조국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았다.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을 베풀듯이 우리들의 애국심이 맹목적인 것이라 생각되었지만 우리들은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슴속에 심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형제들은 제7회 아시안게임을 통해 또한번 분단된 나라의 서글픔을 몸으로 체득해야만 했다.

 1974년 겨울 우리들은 이란 바카라나이트클럽의 무대공연이 너무 힘들어 요르단의 수도 암만으로 잠시 옮겼다.

 우리들은 암만에서 잠시 공연을 갖다가 다시 ‘中東의 파리’라 불리는 베이루트로 갔다.

 중동연예계의 대부 바하두리안이 우리들을 초청했기 때문이다.

 중동의 상업적인 요충지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베이루트는 중동을 통과하는 거의 모든 항공사의 여객기가 기착하는 해상과 항공교통의 중심지였다.

 우리 파비브핑거스는 바하두리안의 주선으로 당시 세계 최대의 극장식 카지노 ‘두리방’에서 공연을 하게 됐다.

 카지노 ‘두리방’은 베이루트이 관광명소로 중동에서 활동하는 모든 연예인들이 가장 오르고 싶어하는 무대로서 고급사교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중동전역의 귀족과 부호들뿐만아니라 유럽의 백만장자들이 몰려들어 하루저녁에 무수한 돈을 뿌리며 흥청망청하는 곳이었다.

 파이브핑거스는 두리방의 무대 공연 첫날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중동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사이두아라비아의 왕자들과 유럽에서 온 관광객들 한테도 인기를 독차지 했다.

 종업원만 3천명이 넘는 세계 최대의 카지노 두리방에서 공연한 것 자체만도 영광이었는데 폭발적인 인기까지 얻은 것은 꿩먹고 알먹고, 둥지뜯어 불지피는 금상첨화였던 것이다.

 우리들은 계약기간 3개월을 두번이나 연장하며 두리방에서 9개월동안 공연했다.

 현지의 신문들은 연일 우리들의 공연상황을 보도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두리방에서의 계약기간이 끝나갈무렵 드디어 우리들에게 유럽진출의 계기가 되는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정리=서울 김순환기자>  옮긴이 김재춘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