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객사와 풍패지관 탐방
전주객사와 풍패지관 탐방
  • 양태석
  • 승인 2019.06.06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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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 풍패지관(보물 제583호)은 빈객을 접대하고 숙박시키는 곳이지만, 전패를 모시고 국왕에 대해 예를 행하던 곳이며, 조정의 칙사가 오면 이곳에 유숙하면서 교지를 전하기도 하였고, 지방 고관이 부임하면 먼저 이곳에 들러 배례를 올렸던 곳이다.

 풍패지관 현판의 서자로 알려진 주지번(朱之蕃).

 그러나 풍패지관의 현판엔 서자의 낙관이 없다. 그래서 많은 향토사학자들은 풍패지관이란 현판의 글씨가 주지번의 글씨라고 단정 지어 말하지 못한다.

 다만 일설에 의하면, 익산 출신 표옹 송영구는 1593년 송강 정철의 서장관(書狀官) 자격으로 북경에 들른 일이 있었다. 그때 조선의 사신들이 머무르던 숙소에서 과거시험에 여러 번 낙방한 후 호구지책으로 허드렛일을 하는 청년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주지번이었다.

 표옹은 청년이 문장에 대한 이치는 깨쳤으나 전체적인 격식에는 미흡한 점이 있었으므로, 조선의 과거시험에서 통용되는 모범답안 작성 요령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2년 뒤 이 청년은 명나라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하게 되었고, 1606년 명나라 황손 탄생을 반포(頒布)하러 온 공식외교 사절단의 최고책임자인 정사(正使)의 신분으로 조선에 오게 되었다.

 공식 일정을 마친 주지번이 익산 왕궁 장암리에 살던 표옹 송영구를 만나기 위해 전주 풍패지관에 머물면서, 표옹의 은혜에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쓴 편액이 바로 지금 전주 풍패지관에 걸려있는 현판이라고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이 설에 많은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주지번은 왜 풍패지관이라고 썼을까?

 풍패는 한 나라를 건국한 유방의 고향(패현 풍읍)을 일컫는 말이다. 즉 풍패란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일컫는 한 고조의 고향이니, 왕조의 본향을 지칭하는 것으로 전주도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듯하다.

 만일 주지번이 쓴 글씨가 확실하다면, 은혜를 받은 사람이 출세하여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보은의 차원에서 써준 글씬데 뭐가 잘못 되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조선왕조의 발상지인 전주의 풍패지관에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인이 쓴 글씨의 현판이 지금까지 걸려 있어야 했는지 궁금하다. 조선에도 명망 있는 서예가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혹시 명과 청나라의 위세에 눌려 현판 글씨를 바꿔달지 못한 것은 아닌지?

 아니면 전주를 풍패와 동일시 해 준 주지번에게 고마움의 답례로 남겨둔 것인지?

 풍패지관은 원래 전주객사였으나 그동안 해온 역할에 걸맞지 않게 2012년 풍패지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전주객사를 풍패지관으로 개명한 일은 마치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것 같아 아쉬움이 많다. 풍패지관 앞을 지날 때마다 가로 4.66m, 세로 1.79m의 웅장한 크기의 현판을 보게 되는데, 그때마다 착잡한 마음이 되어 여러 생각에 잠기게 된다.

 양태석 도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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