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단상
민들레 단상
  • 김석기
  • 승인 2019.06.04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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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천변을 걷다가도, 다가산을 올라가다가도, 효자동에 있는 사무실에 출근하다가도 어디서는 쉽게 만날 수 있는 흔한 꽃이 있다. 심지어 도심의 시멘트블럭 틈새에도 피어난다. 민들레다. 누구도 돌보거나 관심조차 갖지 않았지만 질긴 생명력으로 아무데서나 집을 짓고 그 어떤 꽃보다 화사하게 피어난다. 그래서 민들레는 민초(民草)라고도 부른다, 민들레는 어릴적 최고의 놀잇감이었다. 동그란 씨앗을 입에 대고 후우~하고 불어대면 바람에 실려 훨훨 날아가는 민들레 꽃씨를 보며 마냥 좋아했던 기억이 새롭다. 꽃씨는 무려 100리 이상을 날아가 새 생명을 싹틔운다.  

80년대 초반 가수 조용필이 부른 ‘일편단심 민들레야’는 애잔한 멜로디와 절절한 가사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이 노래에 담긴 애달픈 사연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6?25전쟁 때 남편이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노점좌판을 하며 홀로 3남매를 키우며 살아온 이주현(당시 72세) 할머니가 소식조차 알 수 없는 남편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쓴 자서전의 내용을 다듬어 노랫말을 만들었다고 한다. 노래 가사 속의 ‘그 여름 어인 광풍’은 청천병력과도 같았던 6?25전쟁을, ‘낙엽지듯 가시었나’는 납북된 남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민들레는 포화 속에서도 피어났다. 6?25참전용사인 함동선 시인은 포항전투에서 목격하였던 민들레에 얽힌 사연을 시로 남겼다. “포항전투에서 전사한 학도병 손에 쥔/ 어려서 본 하이얀 민들레 / 난 평생 눈 멀었다.” 포항전투는 많은 학도병들이 전사하거나 실종된 치열했던 전장이다. 포항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학도병들은 스스로 2개 소대를 편성하여 1950년 8월 11일 새벽 4시부터 무려 11시간 동안 북한군을 저지하였다. 이 전투에서 71명의 학도병 중 47명이 전사하고 17명이 실종 또는 포로가 되었다. 아직 꽃도 피워 보지 못한, 젊다기 보다는 어린 학도병들이 초개같이 스러져간 전투에서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하이얀 민들레를 움켜 쥔 학도병의 모습이 평생 눈앞에 아른거려서 눈멀었다고 표현하였다.  

민들레는 우리민족의 정서와도 닮아 있다. 소박하고 청순하고 은은하고 정이 가는 자태하며, 밟혀도 밟혀도 고개 쳐들고 일어나는 모양새하며, 수많은 외세의 침략에도 굴하지 않았던 선열들의 호국의지를 보는 듯하다. ‘감사의 마음’을 꽃말로 가진 민들레는 바람을 타고 멀리 멀리 퍼져나가 새로운 생명으로 피어난다. 보훈이 그렇다.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숭고한 희생을 따뜻하게 감싸 안고 그 가치와 정신을 널리 알려 사람들의 가슴속에 ‘애국’으로 뿌리내리기 때문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국가를 위한 희생과 헌신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각종 행사가 전국적으로 열린다. 오늘의 평온한 일상이 얼마나 많은 희생과 헌신에서 비롯되었는지 돌아보고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적 기억을 일상의 보훈으로 현재화 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생활 속의 보훈문화다. 6월은 보훈문화의 향기에 흠뻑 취해보길 권한다. 오늘 따라 민들레 차의 은은한 향과 맛이 입안 가득 풍긴다. 민들레 꽃말처럼...

  

 전북동부보훈지청장 김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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