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13) 도약과 영광 2
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13) 도약과 영광 2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5.31 1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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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서 최초로 공연할때의 모습. 왼쪽부터 승규 용규.

 꼬박 이틀이 지난 후에야 金 대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나라와 오만이 국교 수립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金 대사는 곧 우리들의 공연장을 방문, 코리안 플라워 덕분에 100% 외교 성과를 거뒀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 멤버들은 뛸듯이 기뻐했고 金영주 대사가 떠날 때까지 매우 친밀해졌다. 형수 洪화자는 한국 음식을 먹고 싶어하는 金 대사에게 김치를 담가주고 미역국을 끓여주는 등 가족처럼 대해줘 金 대사는 너무나 고마워했다.

 1974년 4월초 金대사는 열흘동안의 임무를 마치고 서독으로 귀임하면서 당시 유럽에서 공연하다 아버지의 급작스런 타계로 소식이 끊겼던 동생 상규와 애숙의 행방을 수소문해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아버지는 우리들이 중동으로 진출한 직후 그룹 식스코인스를 이끌고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진출 코리아 하우스란 식당을 경영했다.

 식스코인스는 그곳에서 연주를 하며 지냈는데 아버지의 급서로 소식이 끊어졌던 것이다.

 뒤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는 74년 3월4일 밤 취침중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상규와 애숙이 온몸을 주무르고 의사가 응급처치를 했지만 별무효과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장례식은 그곳 교민들의 주선으로 무사히 치렀지만 당시 열여섯살의 상규와 열두살의 애숙은 천애고아가 되었고, 식당도 경영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손쓸새도 없이 식당을 관리하던 지배인이 동생들 몰래 코리아 하우스를 팔고 도망가 버렸다고 한다.

 그 북새통에 식스코인스 멤버들은 뿔뿔히 흩어졌고….

 金 대사가 오만을 떠난지 1주일이 지나서 상규로부터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상규는 울음반 눈물반으로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식스코인스가 해체된 뒤 애숙은 교포들의 집을 전전했고, 자신은 방콕으로 돌아가 그 곳에서 활동하던 한국계 연예인들과 합세, 해체된 그룹 식스코인스를 재조직했다고 설명했다.

 그리하여 새 멤버들은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데려가 연습한 끝에 새 일자리를 구해 일하고 있다고 했다. 물론 애숙도 함께 있다고 했다.

 상규의 설명에 우리 멤버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동생들과 규칙적으로 전화연락을 취하기로 하고 수화기를 놓았다. 참으로 기구한 우리들의 운명이었지만 안심이 되었다.

 상규가 그 어린나이에 홀로서기를 했으니 대견한 생각이 들었고 金 대사가 두 동생들의 활동을 적극 후원해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승규) 상규와의 연락이 있을 때마다 우울한 상념에 젖어들곤 했다.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고, 결국 아버지의 임종도 못지킨데 대한 유교적인 죄책감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감상에 젖어있기에는 베이루트의 밤이 너무 길었고, (공연스케줄이 꽉 차있었다) 우리들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갔다.

 코리안 플라워는 무스카트에서 7개월동안 일했다. 알파라자 호텔에서의 생활은 더이상 바랄 수 없을 정도로 편했고, 부러운 것이 없었다. 최고의 수입에 최고의 호화생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을 리드하는 영일형이 하루는 우리 멤버들을 한데 모아놓고 말했다.

 “여기서는 생활이 너무 편하니 나태해져 음악에 발전이 없다. 고생이 되더라도 유럽으로 나가보자”
 

 <정리=서울 김순환기자>  옮긴이 김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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