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12) 도약과 영광 1
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12) 도약과 영광 1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5.28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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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가이즈 앤드 돌스’의 핵심 멤버로 인기를 끌 당시의 필자와 식스코인즈 멤버들.

 지금이야 중동의 모든 나라와 수교가 되서 자유로이 왕래하고 있지만 70년대 초만해도 우리보다 北韓과 수교한 나라가 더 많았다. 그런만큼 우리 형제들은 민간 외교사절로 개척자적인 조심성과 매너가 필요했다.

 물론 그들에게 있어서 코리아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알려져 신비스런 나라로 인식돼 있었지만….

 우리가 오만에 첫 진출하여 숙박을 정한 곳은 수도 무스카트의 최대 호텔인 알파라자 호텔이었다. 우리가 호텔에 도착해보니 작은 헤프닝이 일어나 있었다. 호텔 곳곳에 우리들을 소개한 포스터가 붙어 있었는데 우리 그룹의 이름이 ‘파이브 핑거스’(다섯손가락)가 아닌 ‘코리안 플라워’라고 표시돼 있었던 것이다. ‘코리안 플라워’란 이름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전에 사용한 이름이었기에 우리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영일형이 관계자를 만나 연유를 물었더니 그는 “한국이란 말을 쓰는 것이 손님들에게 신비스러움을 줄것 같아 의도적으로 코리아란 이름을 썼다”고 설명했다.

 그 관계자는 덧붙여서 “멤버들의 나이가 어리니 한국의 꽃이란 이름이 얼마나 어울리겠느냐”고 되물었다.

 파이브 핑거스란 이름을 고집하던 영일형도 그 관계자의 설명에 그럴듯 하다면서 고집을 꺾는 눈치였다.

 당시 오만은 영국의 오랜 지배에서 독립한지 얼마안된 신흥 산유국이었다. 그런만큼 그곳은 로열, 더치, 셀 등 서구의 유전재벌들이 대거 진출, 원유개발을 벌이는 각축장이었다.

 알파라자호텔은 바로 원유로 돈을 번 왕손과 귀족 등 정부의 고관대작 그리고 각국의 외교사절, 석유회사의 고위간부들이 사교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회교율법이 엄격한 이슬람의 나라 황량한 도시에서의 사교는 그들에게 무한한 즐거움을 주엇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튼 우리는 첫 공연부터 인기를 독차지하며 박수갈채를 받았다. 우리 멤버들은 곧 각국의 외교관들과 그곳 귀족들의 친구가 되었고 특히 나와 용규는 그들을 통해서 귀족스포츠인 승마, 볼링, 수영 등을 배웠다.

 ‘코리안 플라워’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가 우리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그곳 신문을 장식했다. 우리들이 얼마나 인기가 있는가 하면 멤버 한 사람이 배탈이 나도 신문에 나올 정도였다.

 독자들은 우리들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대충 짐작할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우리 멤버들이 호텔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데 웨이터 한 사람이 코리아에서 오신 손님이 예약했다고 귀뜸했다. 당시 오만은 南北韓 모두와 외교관계가 없었던만큼 우리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무척 궁금했다.

 잠시후 동양인 두사람이 우리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려고 했다. 우리 멤버들이 호기심에서 그들을 쳐다보는 사이 영일형이 용감하게? 그분들한테 다가가 한국에서 오셨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낯선 이국에서 모국어를 들으니 무척 반갑다는 표정으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두사람은 우리 대한민국 정부의 특사로 오만을 공식 방문했던 당시 주서독대사 金영주 씨였다.

 우리들은 너무나 반가워 그들과 합석을 하여 점심을 먹었다.

 그분들은 아직 수교가 안된 오만과 국교를 맺기위해 교섭차 왔다고 했다.

 용규와 나는 드디어 우리들의 역할을 톡톡히 할 때라 생각하고 친하게 지내던 오만의 왕자 한 사람을 金 대사가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도록 연락이 없어 우리들은 무척이나 궁금해 했다.
 

 <정리=서울분실 김순환 기자>  옮긴이 김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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