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한루 600년, 새 역사 쓴다
광한루 600년, 새 역사 쓴다
  • 양준천 기자
  • 승인 2019.05.26 14: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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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남원 광한루 600년 上
남원 광한루 전경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 달나라 궁전 광한루(廣寒樓)

광한루원 입구에 들어서자 ‘광한루(廣寒樓)600년의 해’라는 현판이 보인다.

600년의 세월. 30년을 한 세대로 본다면 20세대가 이어온 세월이고 조선왕조가 500년을 이어오다 끝을 맞았으니 왕조보다도 긴 역사를 지랑하는 것이다.

지난 1969년 은하수를 상징하는 광한루의 연못을 넓히면서 새롭게 지어진 완월정은 달(月)을 희롱(玩)한다는 이름이 참으로 문학적이다.

춘향제의 메인 무대인 완월정(玩月艇)에서는 시끌벅적한 공연이 항상 열리고 약간은 더운 날씨에도 많은 관객들이 모여 1년에 한 번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수준 높은 공연을 즐길 수 있다.

비교적 최근에 지어졌음에도 광한루원에서 그 모습이 도드라지지 않는 것은 이름 하나까지 주변의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고자 최선을 다한 노력 때문 일 것이다.

완월정(玩月艇)을 지나자 오작교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1년에 하루 칠월칠석에만 까마귀와 까치가 몸을 희생해 만드는 다리를 통해서만 만남이 허용되는 견우, 직녀의 설화가 스며든 오작교는 지상에서 천상에 위치한 광한루에 도달할 수 있는 통로다.

은하수를 상징하는 광한루의 연못에는 잉어가 유유히 헤엄치며 관람객을 반기고 있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관광객들이 서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오작교를 건너자 드디어 광한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춘향과 몽룡이 만나 사랑이 시작됐던 장소,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에 사랑이야기가 덧붙여져 이제는 이야기에 현실이 묻어 들어간 것인지, 현실에 이야기가 더해진 것인지 모호하게 되어버린 곳이다.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재상인 황희가 남원으로 유배됐던 1419년 이곳의 수려한 풍광에 매료돼 만든 정자가 바로 광통루(廣通樓)였다.

이후 세종조에 전라관찰사로 부임한 정인지가 그 아름다운 모습을 달나라에 있는 궁전, 광한청허부에 비유해 광한루라 이름 붙였고 이후에는 광한루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광한루는 조선시대 지배적 이데올로기였던 유교의 이상향에 도교적 판타지를 더해 완성된 유토피아로 조선조 사대부들이 가장 꿈꿔왔던 환상적인 곳이었다.

“만고강산 유람할 제 삼신산이 어드메뇨, 일봉래(一蓬萊)이방장(二方丈)삼영주(三瀛洲)가 아니냐”고 유명한 단가인 만고강산의 첫 소절이다.

중국 전설에 등장하는 삼신산(三神山)을 우리나라의 산에 빗댄 이 구절에서 일봉래는 금강산, 이방장은 지리산, 삼영주는 한라산을 뜻한다.

그리고 광한루 앞 은하수를 표방한 연못에는 1582년 남원부사 장의국에 의해 삼신산이 세개의 섬으로 만들어져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그러나 광한루에도 혹독한 긴 겨울의 세월이 있었다.

민족의 암흑기였던 일제 강점기. 광한루는 우리 민족만큼이나 큰 고초를 겪었다. 일제에 의해 광한루는 재판소로 사용되며 ‘황군만세’라는 팻말이 붙었으며 아래는 감옥으로 사용되며 모진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그 혹독하고 모진 겨울에도 광한루는 끝끝내 인고하며 모진 세월을 감내하고 현재 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남원의 자존심을 굳게 지켜내고 있다.

올 봄 춘향제를 비롯 축제가 계속되는 광한루는 우리 조상들이 꿈꿨던 이상향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채 모두가 꿈꾸는 봄이 광한루의 봄이 절정으로 향하고 있다.

더군다나 600년이라는 역사가 아로 새겨진 광한루에서 모두와 함께 꿈꾸는 봄은 눈부시게 이를 데 없는 자태를 뽑내고 있다.

600년이 흐르는 동안 광한루는 600번의 봄을 맞이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금 새로운 600년을 맞이하기 위한 채비를 마치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남원=양준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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