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호 초등학교 노인 동창회
화호 초등학교 노인 동창회
  • 김승곤
  • 승인 2019.05.22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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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인 1918년 넓고 넓은 호남평야 한 복판인 정읍군 신태인읍 화호리에 설립된 화호 용문 초등학교는 멀리 솟은 고부 두승산이 앞에 보이고 뒤에는 지평선이 아른거리는 김제 벌판이 시원하게 펼쳐있다.

 사방팔방에서 책보를 허리에 두르고 모여든 코흘리개들로 머리는 빡빡 깎았어도 눈망울은 밤 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던 우리들은 소란한 북새통에 시작 종소리도 못 듣고 서로 뒤엉켜 뛰어 놀던 운동장이 지금은 폐교되어 적막한 교정은 잡초만 우거져 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전북 최대 규모의 농지를 소유했던 일본인 지주 구마모토가 창설했던 주식회사 웅본농장에 소속되어, 소작농들에게서 수탈한 곡식을 저장한 거대한 창고들이 해방후 농림부지정 농촌위생 연구소와 종합병원으로 전환되면서 벼의 호수를 의미하는 화호는 김제와 정읍을 잇는 교통상 요지일 뿐 아니라 부유한 농촌으로서 일찍 개화되어, 화호 여중은 한때 배구의 명문학교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화호 초등 제 33회 졸업생들이 졸업후 44년 만인 1995년 5월 5일에, 뿔뿔이 헤어져 살던 36명의 동창생들을 찾아내어 첫 동창회를 개최하였다. 

 그 이후로 봄이면 수도권에서, 가을이면 지방에서 매년 두 번씩 모교가 폐교된지 20년째인 금년에도 전국에 유례가 드물 정도로 이 모임은 어김없이 이어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창씨개명 당했던 당시의 우리 초등 1학년생들 중에는, 해방이 되자 낫 놓고 기역자도 몰라 도로 1학년에 무더기 재수한 경우도 있고, 6.25 전쟁이 터지자 북한군이 점령한 우리 지역은 폭격이 무서워 6학년 때 석달 동안이나 학교에 못 갔고, 후방에 남아 치료 받던 인민군들과 함께 어울려 넓은 병원 마당에서 놀기도 하였다.

 이렇게 부끄럽고 아픈 과거와 함께, 버스 한 대를 가득 채워 1995년에 시작한 동창회는 세월이 흘러 점점 늘어나는 빈 자리들은 미망인들로 메워가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난 4월 21일 부활절 날 열린 동창회는 김제 역전 광장에 서울과 지방에서 모여든 80대 초반 노인들이, 관광버스에 비틀거리며 몸을 올려놓고 고군산 열도로 봄 나들이를 갔다.

 금년에는 스승의 날 특별 기획으로 정읍의 참예우 식당에서, 정읍 덕천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하신 후 교회 장로로 맹활약 하시는 94세의 고재만 은사님 내외분을 모시고 12명의 노인 제자들이 훈화를 들으면서 점심 회식을 즐겼다.

 첫 번 모임때의 36명은 그 동안 9명이나 세상을 떠났고 제자들의 연령 분포는 81세에서 85세 까지 였다. 특이한 사항은 재학중 형제나 남매간이 예닐곱 쌍이나 되었는 데, 이는 당시에 유아의 높은 사망률 때문에 출생신고를 일부러 늦추었거나 또는 너무 가난해서 학교에 못 다닌 형이나 누나가 해방이 되자 동생과 함께 입학했기 때문이다.

 평생 농부로 힘들게 살아 온 몇몇 제자가 건강관리 잘 하신 은사님보다 더 연로해 보이는 진풍경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우리 화호 노인 동창회는 앞으로도 죽지 않고 사라질 때 까지 계속되기를 기도한다.

 글= 김승곤(전북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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