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10) 유년의 삽화 9
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10) 유년의 삽화 9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5.2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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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 부속고등학교주최 서울시 국민학교 육상대회에서 우승, 기념사진을 찍은 이승규.

 조국과 고향을 떠난 낯선 이국에서 어머님과의 사별(死別)은 우리 형제들에겐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

 어머니는 무엇보다도 우리 음악의 정신적 지주였고, 열렬한 후원자였기 때문이었다.

 휘황찬란한 조명아래서 관객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아도 허탈한 마음을 가눌길 없었다. 나는 물론이었거니와 용규와 어린 애숙의 슬픔은 더 했다.

 해는 바뀌어 1969년 초 우리 ‘코리안 플라워’는 결국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다.

 형제들 모두가 더이상 신명난 공연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해체된 옛 멤버들은 각자 자기길을 찾아 떠나갔다. 그것은 어머니와의 별리에 이은 또 하나의 침통한 헤어짐이었다.

 나(승규)와 용규, 재현형은 그대로 방콕에 눌러앉아 앞길을 모색했지만 金옥자씨(작년까지 KBS무용단 안무를 맡음), 형수 洪화자씨, 이모 劉선환씨 등은 귀국을 하거나 다른 일자리를 찾아갔다.

 대부분의 멤버가 떠난 뒤 방콕에 남은 우리 3형제는 ‘톰 앤드 제리 브라더스’란 이름으로 그곳의 미국 공군기지 무대에 다시 서기 시작했다.

 톰은 나의 예명이고, 제리는 용규의 예명이었다.

 슬픔을 딛고 일어선 ‘톰 앤드 제리 브라더스’는 서서히 옛 명성을 되찾아가고 있었지만 아버지와의 관계가 차츰 소원해져 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당시 우리외에도 그룹 ‘식스코인스’(애숙, 상규)와 함께 태국 현지의 그룹 몇개를 더 운영하고 있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급전직하로 악화된 것은 아버지가 우리들의 재능과 음억성에 회의를 품기 시작하면서 였다. 우리들은 결국 아버지와는 도저히 음악을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1971년 한국에서는 대통령선거로 혼란스런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는 뉴스가 가끔씩 태국 방콕의 신문들을 장식하고 있었다. 조국의 상황과 우리 집안의 상황이 어쩌면 그렇게 비슷한지 몰랐다.

 아버지는 우리들의 음악에 거의 무관심하다시피 했고, 그런만큼 우리 3형제는 뾰족한 돌파구 찾기에 골몰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 3형제는 사전모의?를 해 가출할 결심을 했다. 아버지가 외출해 느젝 돌아올 것 같은 날을 디데이로 잡아 우리들은 드디어 집을 나왔다. 그러나 막상 집을 나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

 우리들은 한 이틀을 이곳저곳을 전전하던차에 마침 영일형이 방콕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형제들은 구세주를 만난 기분으로 영일형의 숙소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아버지 밑에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으니 우리들을 맡아달라”고 졸라댔다.

 당돌하게도 아버지를 두고 가출한 우리 형제들을 본 영일형은 실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영일형은 우리 형제들에게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호통을 쳐댔지만, 우리 3형제는 한국으로 돌아갔으면 갔지 아버지에겐 다시 못돌아가겠다고 메달렸다.

 한참을 그렇게 실랑이를 벌인 영일형은 포기를 했는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즉각 달려온 아버지는 우리들의 반란에 길길이 날뛰었지만 아들들의 결심이 너무나 단단하다는 것을 알고 체념하시면서 모든 것을 영일형에게 맡기겠다고 하셨다.

 우리 3형제는 그렇게해서 새로운 각오를 다지며 모든 것을 영일형에게 맡겼다. 영일형은 세명으로는 무대가 단조롭고 인기를 얻을 수 없으니 멤버를 보강하자고 했다.

 그런데 막상 팀을 구성하려니 사람이 없었다.
 

 <정리 서울분실 김순환 기자>  옮긴이 김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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