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계절, 보릿고개 너머 보리축제의 신화 만연하길
초록의 계절, 보릿고개 너머 보리축제의 신화 만연하길
  • 정영신
  • 승인 2019.05.16 17: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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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산야가 담초록 진초록 초록빛 세상이다. 이 거리 저 거리 가로수로 서 있는 이팝나무 새하얀 꽃들이 눈부시게 흩날리고, 아카시아 흰 꽃도 이제 막 한 잎, 두 잎, 눈을 뜬다. 멀고 가까운 숲마다 갈참나무 굴참나무 신갈나무 연초록 새순이 끊임없이 5월의 햇살에 입을 맞추고, 먼 들녘에는 청보리 푸른 잎이 은빛 너울로 온 바람을 맞는다.

 초록의 계절이다. 지역 곳곳마다 초록빛 문화행사가 다양하다. 보리의 고장 고창에서는 ‘고창 청보리밭 축제’가 열렸고, 벚꽃축제로 유명한 군산에서는 이름도 풍류적인 ‘군산 꽁당보리 축제’가 14회째 개최되었다. 과거 가난과 한 맺힌 가족사의 상징이며 아픔의 상징이었던 보리가 국민소득 삼만 달러, 국제화시대, 우리 것이 곧 글로벌 명품이 되는 이 시대에 귀한 존재로 다시 새롭게 재탄생을 한 것이다.

 보리는 가을에 파종하여 폭설 쏟아지는 시린 겨울을 이겨내고 초여름에 수확하는 2년이라는 긴 농작기간이 필요한 곡물이며, 소생과 부활, 인내의 상징물이다. 호메로스 시대 그리스 사람들의 주식이며 아리안 족이 재배한 최초의 곡물 중의 하나가 곧 보리이다. 고대 그리스의 엘레우시스 축제는 크레타 섬에서 보리를 지칭한 델라이(delai)라는 말에서 유래한 데메테르 여신을 위한 것이며, 이 축제의 달리기 우승자에게는 상품으로 보리이삭이 주어졌다. 또한 신에게 바쳐진 재물은 보리로 만든 떡이었고, 이 보리떡은 보리이삭과 함께 쌀보다도 더 잘 부풀고 팽창하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우주 에너지와 생명의 신비를 상징하며, 고대 종교행사에서도 보리는 성물(聖物)로 사용되었다.

 동명왕 신화에서도 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할 때 그의 어머니 유화(柳花)는 주몽에게 오곡(五穀)의 종자를 주었고, 주몽은 뒤따라오는 비둘기를 잡아 보리씨를 꺼낸 다음, 물을 뿌려 그 비둘기를 다시 살려 어머니 유화에게 돌아가게 했다. 이 신화에서도 귀소(歸巢)본능이 뛰어나며 평안과 장수를 상징하는 비둘기의 목에서 주몽이 꺼낸 것은 오곡 중에서도 보리이며, 이 보리는 어머니 유화의 길 떠난 아들을 향한 간절한 바람인 생명의 소생과 부활, 주몽이 머무는 공간과 시간의 풍양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에 농촌에서는 주로 쌀을 팔아 생활필수품을 사거나 학자금으로 사용하고 쌀 대신 보리를 주식으로 삼았기 때문에 ‘보리농사는 세간 밑천’이며 무엇이든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나 대상을 보리에 비유하였다. 그래서 정석도 모르고 대충 두는 바둑을 ‘보리바둑’, 곡식 등 뇌물을 주고 벼슬을 산 사람은 ‘보리동지[麥同知]’, 울음소리가 참매미보다 못한 매미는 ‘보리매미’, 어떤 모임에서 입을 열지! 않는 사람은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라고 칭한다.

 일제 강점기, 1950·1960년대, 가을에 수확한 쌀은 바닥이 나고 아직 시푸른 들녘의 보리가 여물기 전, 대부분 1차 산업인 농업에 의존했던 우리 백성들은 먹을 식량이 거의 없어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심각한 춘궁기(春窮期)를 견뎌내야 했다. 4월부터 6월에 이르는 이 최악의 빈곤기를 이 세상 고개 중 가장 넘기 힘든 보릿고개라고 했으며, 일제강점기에도 이 보릿고개를 넘지 못해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했고, 결국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만주나 시베리아 등 그 험한 타국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가수 진성이 부른 ‘보릿고개’ 가사에 춘궁기 우리 어머니들의 설움과 아픔이 잘 드러나 있다.

 아야 뛰지 마라/배 꺼질라/가슴시린 보릿고갯길/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배 채우시던/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초근목피의 그 시절/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한 많은 보릿고개여/풀피리 꺾어 불던/슬픈 곡조는/어머님의 한숨이었소/……/어머님의 통곡이었소.

 초록의 계절, 청보리의 계절이다. 부활과 인내, 생명의 소생과 우주 에너지의 신비, 지혜와 완숙, 신생과 풍요의 상징인 보리. 암울한 시대의 고개를 힘들게 넘어 국민소득 2만 달러, 인구 5천만이라는 선진국 진입의 조건을 가득 채우고 20-50클럽 일곱 번째 가입국, 세계 10위권의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자랑스러운 우리 대한민국. 요즘 여러 분야에서 조금은 흔들림이 있지만 이 나라 지도자와 정치인들은 그 본분에 맞게, 국민들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본분에 맞게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그 슬프고 험한 보릿고개 너머 보리축제로 재탄생한 청보리처럼 우리 국가와 사회, 가정 곳곳에 청보리의 신화가 만연하기를 기원해본다.

  정영신<전북소설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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