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8) 유년의 삽화 7
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8) 유년의 삽화 7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5.14 10: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린시절 부모님과 단란한 한때. 뒷줄 왼쪽이 어머니 오른쪽이 아버지 앞줄 왼쪽부터 승규, 용규.

 월남 남부의 삼각주지역은 평소에 포탄소리는 커녕 총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한 시간이상 포탄이 떨어져 쑥대밭이 된 것이다.

 베트콩들이 美본토에서 많은 美軍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선제공격을 가한 것이다.

 그날의 폭격으로 우리들이 묵으려했던 美軍기지는 활주로조차 완전히 파괴돼 비행기가 이착륙하지 못했다. 우리가 그곳에서 쫓겨나(?) 목숨을 구했지만 전쟁의 참상을 또한번 체험했던 것이다.

 1967년 우리들은 월남공연을 하는 도중 잠시 귀국, 약 한 달동안 서울에 체류하면서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귀국공연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들의 공연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싱가포르 등 東南亞에서 새로 익힌 사이키델릭 등 최신 유행음악으로 꾸민 무대가 국내팬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이다. 당시 국내에서는 트로트계열의 가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형제들은 뜻하지 않은 귀국공연의 실패로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버렸다. 동남아 어르곳을 가도 수많은 박수 갈채와 컨튼콜을 받았는데 조국 서울에서는 박수는 커녕 텅빈무대에서 공연해야 했기때문에 어린마음에 자존심이 상해도 한참 상했던 것이다.

 우리들의 이러한 모습에 가장 가슴아픈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그런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들을 위로했다.

 어머니는 “홍보 등 섭외가 잘되지 않았고, 한국은 다른나라보다 유행이 2~3년 늦기 때문”이라고 격려하면서 “너희들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룹이 된다면 우리나라 팬들도 알아줄테니 이번 공연을 계기로 더욱 반발하라”고 말씀하셨다.

 또 어머니는 이때부터 입버릇처럼 ‘세계적인 그룹’으로 성공하기 전에는 국내무대에 서지 말것을 강조했다. 우리들은 어린 마음에 조국에서 관심을 못끄는데 어떻게 세계적인 그룹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일곤했지만 어머니는 그때마다 국내에서 인기 높은 것은 우물안 개구리식의 인기라며 우리들을 달래곤 했다.

 1개월간의 착찹한 휴가가 끝나고 우리들은 다시 전쟁의 나라 월남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꾸렸다. 나와 마찬가지로 용규, 예숙 등 형제들은 월남에 가지 않고 동네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싶었지만 어머니만 보면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같은 또래 아이들과 놀 기회가 없었던 우리들은 이웃집아이들과 노는것이 신명났기에 친구들과 헤어지기가 그렇게 싫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우리들의 희망사항일 뿐 어머니는 월남행을 독려했다.

 용규와 내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즐기는 스포츠는 볼링이다. 월남에 주둔한 미군기지는 거의 볼링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볼링을 쉽게 익힐 수 있었다.

 이런 우르을 본 영일형이 볼링공을 사서 용규와 나에게 하나씩 주었다. 우리들은 너무 신이 나 공연장을 옮겨 갈 때마다 볼링공을 가지고 다녔다.

 그러나 볼링 공 때문에 된통 혼쭐이 난 일이 한 번 있었다. 우리들이 1주일의 휴가를 보내려고 태국의 방콕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일어난 일이다.

 나와 용규는 가방에 볼링공을 넣은채 베트남항공사의 방콕행 여객기에 탑승했다. 당시만해도 볼링공을 가지고 다닌다고 특별히 검색을 받거나 하는일이 없었다.

 비행기가 중간기착지인 프놈펜에 도착할 때였다. 안내방송에서 안전벨트를 매라는 멘트가 나오고 비행기의 상체가 기울며 하강하는 순간 조종실쪽에서 꽝하는 굉음이 났다. <계속>  

 <정리 김순환 기자>

옮긴이 김재춘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