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 김규식김순애 부부
이달의 독립운동가 : 김규식김순애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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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5.13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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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마음으로 독립 투쟁의 최일선에 섰던 부부 독립운동가
 
  국가보훈처는 ‘김규식, 김순애’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자로 선정하였다. 1881년 출생한 김규식 선생은 1897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로아노크 대학에서 공부하고,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았다. 로아노크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선생은 영어, 불어를 포함하여 8개 언어를 구사했다고 하는데요, 이는 이후 파리강화회의에 우리 민족 대표로 선발된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귀국한 김규식 선생은 국내에서 강연을 통해 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1913년 11월, 상해로 망명하여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 프랑스에서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김규식 선생은 한국 대표로 파견되어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고, 5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총장 자격으로 한국독립에 대한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비록 열강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한국의 문제는 상정되지 못했지만, 파리강화회의 개최 소식이 국내외에 전해지자, 일본 동경에서는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2.8독립선언대회가 열려 3.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한편, 김규식 선생과 함께 상해로 이주했던 김순애 선생은 1919년 7월 그곳에서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하고 지원하였다.

  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자금난으로 곤경을 겪게 되자 김순애 선생은 재정 지원 활동을 하고, 독립전쟁을 대비하여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하여 다수의 간호원을 양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30년대와 40년대에 걸쳐, 김순애 선생은 한국독립당 산하의 여성 독립운동단체인 한인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고, 한국애국부인회를 다시 출범시키는 등 한국독립당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같은 시기, 김규식 선생은 미국을 방문하여 독립운동 단체의 역량을 집중시키기 위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운동을 전개하고 수천달러를 모금해 돌아왔으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거쳐 1944년에는 부주석에 취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김구 주석과 김규식 부주석 체제의 양대 정당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력이 연대하며 협력하였고, 독립을 향한 이러한 노력들이 모여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이루어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순애 선생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김규식 선생은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전북동부보훈지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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