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7) 유년의 삽화 6
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7) 유년의 삽화 6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5.10 0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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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부산국제극장에서 처음으로 출연, 관객들의 박수 갈채를 받을때 이승규(오른쪽), 용규 형제.

 우리가 그 수송기를 타지 않은 것은 신의 축복이었다. 사이공을 출발한 수송기는 이륙한 지 10분뒤 베트콩의 대공포화에 맞아 추락,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월남공연중 죽을 고비를 넘긴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우리들이 사이공에서 약간 떨어진 나트랑의 넵툰클럽이라는 곳을 근거지로 주변 여러곳에서 일할 때이다.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공연하는 ‘집시공연’인 만큼 모든 악기는 넵툰클럽에 맡기곤 했는데 하루는 다른지역 공연을 위해 악기를 싣고 막 출발한 때였다.

 출발하자마자 뒤에서 굉장한 폭음이 들려왔다.

 혼비백산, 정신을 차리고 알아보니 17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폭발사고였다.

 삶과 죽음의 고비를 넘나드는 아슬아슬한 순간은 계속되었다. 우리들은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는 미군기지를 찾아다니며 공연하는 만큼 주로 비행기를 이용했다.

 항공편이라는 것이 전시에는 위험부담이 제일 높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또 한번은 추라이에서 공연을 마치고 사이공을 돌아오는 때였다. 우리들이 탄 비행기는 2차대전때 연합군이 썼던 12인승 경비행기였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폭음소리가 들려왔다. 베트콩의 기습이었다.

 폭음은 불과 3분밖에 계속되지 않았지만 우리에겐 영겁의 시간이었다.

 금방 추락할 것처럼 이쪽저쪽으로 춤을 추던 비행기가 한참뒤 추라이 공항에 착륙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우리는 아연실색했다. 비행기가 유탄을 맞아 뒷 날개에 구멍이 뚫려있었던 것이다.

 조종사는 유탄 맞은 자리를 가리키며 2cm만 안쪽에 맞았어도 추락했을 것이라며 “OH! MY GOD”을 외쳤다. 문자 그대로 천우신조였던 것이다.

 그러나 낮선 이국에서 죽음의 순간들은 언제나 우리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월남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남부의 메콩강 하류 삼각주 미공군기지에서 공연할 때이다. 밤샘공연을 끝내고 돌아오니 숙소를 옮겨줘야 겠다는 전갈이 왔다. 미군 영내에선 VIP 대접을 받던 우리들은 숙소를 옮겨달란 말에 쫓겨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그날밤 본토에서 공수돼온 미군들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투덜거리며 보따리를 쌌다.

 그날밤 그곳이 불바다가 되리라는 것도 모르는채...


 <정리 김순환 기자>  

옮긴이 김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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