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6) 유년의 삽화 5
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6) 유년의 삽화 5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5.07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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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美8군에서 공연할 때의 ‘全승남과 6남매’ 멤버들. 왼쪽부터 이용규 명숙 인숙 재현 승규. 이 사진은 1081년 스위스의 베르너 자이퉁誌에도 실렸다.

 北韓의 국회의장격인 姜양욱 일행이 베푸는 연회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이야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의 영향으로 공산권과 자유왕래가 이루어지고 북한과의 접촉이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제약을 받고 있었다.

 아버지와 영일형(현 코리아나 단장)은 심사숙고한 끝에 현지의 싱가포르 한국무역관장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얘기하며 상의했다.

 그러나 무역관장은 우리들의 고민과는 달리 “걱정하지 마라! 북한사람들이 있건 없건 마음놓고 노래를 부르라”고 하였다.

 다음날 우리들은 南韓가수들중 최초로 분단민족의 슬픔을 곱씹으며 북한 외교단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북한 외교관들과 서양인들, 현지인들 앞에서 우리는 “한국의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소개하고, ‘이리랑’을 연주한 뒤 ‘타향살이’를 불렀다.

 우리들의 이러한 연주에 북한 외교관들은 중도에 퇴장하고 말았다. 다른 손님들은 공연이 끝날때까지 앉아서 박수 갈채를 아끼지 않았는데 한 핏줄 한민족인 북한사람들은 중간에 나가 버린 것이다. 우리들은 연주를 함ㄴ서도 또한번 분단 조국의 슬픔을 느껴야 했다.

 우리들은 그날 공연이 무사히 끝나자 현지 무역관장이 찾아와 우리 멤버들을 일일이 껴안으며 눈시울을 적셨다.

 무역관장은 “너희들이 외교관들도 못한 일을 해냈다”고 기뻐했던 것이다.

 우리들과 姜양욱 일행과의 묘한 인연은 그로부터 6년후인 1974년에 또한번 있었다. 姜양욱 일행이 공연장에 왔을때 우리는 마침 당시 서울에서 유행하던 ‘서울의 찬가’와 ‘사랑해 당신을’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또 쓰디 쓴 웃음을 짓더니 공연장을 중도퇴장해 버렸다. 분단민족만이 겪는 슬픔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들은 싱가포르에서 두 달동안 공연하고, 이어서 태국의 방콕, 말레이시아의 콸라룸푸르, 대만의 대북호텔 등을 오가며 공연을 하다가 1967년 美 국무성 USO의 초청으로 월남공연을 갖게 되었다.

 전쟁중인 월남에서의 공연은 美국무성의 초청도 있었지만 또다른 목적이 있었다. 당시 어머니(李延漢)는 간경화증으로 방콕 크리스찬병원에서 두 번의 큰 수술을 받고, 서울의 고려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중병을 앓고 계셨다.

 어머니는 1년 반 동안 병원에 입원해 계시면서 그동안 푼춘이 모았던 돈을 다 쓰고도 회복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전쟁중이라 대우가 좋은 월남의 사이공에서 공연하기로 한 것이다.

 월 6천달러에 2개월 공연료를 선불로 받기로 하고 공연한 월남공연애서 우리들은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겼다. 우리가 사이공에서 공연하던중 하루는 사이공과 300여km 떨어진 미군기지에서의 공연을 위해 美 군용기를 타려고 공항에서 탑승수속을 밟고 있었다.

 예약해 놓은 비행기가 도착, 우리가 군용기를 타려하자 연락관이 미안하게 됐다며 다음 비행기를 이용하라고 하였다. 화급히 작전수행을 위해 긴급병력을 이동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시니만큼 양보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양보가 우리들의 생명을 구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정리 김순환 기자>


옮긴이 김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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