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5) 유년의 삽화 4
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5) 유년의 삽화 4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5.03 14: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사랑만리 노래만리’에 출연할 때 휴식시간을 이용해 포즈를 취한 출연자들. 오른쪽부터 아버지 어머니, 상규, 김영일, 애숙, 용규, 승규. 왼쪽 네번째는 형수 홍화자.

 NHK-TV와 와타나베 프로덕션의 귀화공세가 계속되자 어머니는 연장계약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귀국을 서둘렀다.

 나와 용규가 일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공연하고 있는 동안 서울에서는 맏형 범규, 뉴나 명숙, 재현형, 사촌인 인숙누나 등이 美8군 자이언트쇼단의 밴드마스터인 홍신윤씨(나와 용규는 그 이전에 기타연습법을 배웠었다)에게서 기타, 베이스, 트럼펫과 노래를 배우는 중이었다.

 나와 용규는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세기영화사의 음악영화 ‘사랑만리 노래만리’의 출연요청을 받고 3개월 동안 영화에 출연했다.

 우리는 영화촬영이 끝나고 곧 ‘전승남과 6남매’라는 그룹을 조직, 춤, 연주, 촌극, 노래 등을 패키지쇼로 꾸며 국제극장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전승남은 나의 예명이고, 용규는 전용남이라는 예명을 가졌는데 우리들의 그날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날 국제극장에서 우리가 대성공을 거두자 전국의 흥행업자들로부터 공연요청이 쇄도해 우리들은 연일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국내 최초로 극장공연을 패키지쇼로 꾸민 ‘전승남과 6남매’의 인기는 대단해 우리는 1년여 동안 전국의 극장무대를 돌며 공연을 했다.

 나는 ‘천재소년 전승남’이란 칭찬을 각지에서 듣긴 했지만 용규 등 형제들의 활약도 눈부셨다. 특히 동생 용규와 명숙, 인숙 누나등은 가창력과 무용이 뛰어나 관객들을 연일 매료시켰다.

 우리가 이렇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활동하자 美8군 연예공연대행사 ‘화양’에서는 동남아 공연을 제의해 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몇날 몇일 고민끝에 우리들의 천부적인 재질도 살리고 세계적인 그룹으로 키워주기 위해 이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때가 1966년이었으니까 내가 중학교 시험을 치른 직후였고, 동생은 국민학교 5학년이었다.

 우리들이 동남아로 진출하는데는 특히 어머님의 힘이 컸다. 어머니는 우리들이 언젠가는 세계적 명성을 얻는 그룹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신념처럼 간직했기에 동남아 각 도시의 유흥업소와 출연계약을 할때는 직접 통역을 했다.

 우리들은 드디어 1966년 ‘봄 코리안 플라워’란 이름으로 홍콩의 일류 나이트클럽 ‘쇼보트’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우리는 이 ‘쇼보트’에서 주급 1천200달러라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1개월 동안 공연했다. (당시 출연료는 보통 600~700달러)

 홍콩에서의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우리는 서울의 극장가에서 선보였던 패키지쇼를 홍콩실정에 맞게 약간 변형시켜서 공연했는데 관객들이 열괄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홍콩에서 우리들이 대단한 히트를 하자 동남아 각국에서 공연 요청을 해 왔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무대를 싱가포르의 힐튼호텔체인인 싱가포르 호텔로 옮겼다.

 당시 싱가포르에는 우리 공관이 없고 무역관만 있었는데 北韓은 상주공관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것에 개의치 않고 부채춤, 설장고 등을 공연해 연일 대찬사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가 공연하는 호텔에서 북한외교단이 연회를 연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들이 북한외교관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 되는 난감한 처지에 빠진 것이다.

 
 <정리 김순환 기자> 

 옮긴이 김재춘
 

  *1990년 11월11일 일요일자에 나온 리드싱어 이승규의 자전적 수기 (4)편은 DB보관의 실수로 자료가 사라져 게재할 수 없음을 양해 바랍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