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위 자전적 수기 (3) 유년의 삽화 2
코리아나 리드싱어 이승규위 자전적 수기 (3) 유년의 삽화 2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4.30 1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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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코리아나의 멤버들.

 나와 용규는 태어날때부터 춤에는 소질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어떤 춤이든지 한번만 보면 흉내를 낼 수 있었고, 가수와 코미디언들의 특이한 제스처 모방에 남다른 재주를 갖고 있었다. 용규도 마찬가지여서 동생은 나에게 조금도 지지 않겠다며 기를 쓰고 배워 우리 형제는 선의의 경쟁을 벌였다.

 이런 우리들을 아버지는 극장무대에 올리기 위해 전승남과 전용남이라는 예명을 지어줬고, 우리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탭댄스를 춰 무대의 귀염둥이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이럴즈음 아버지는 우리들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 국제극장 운영권도 포기한채 서울로 이사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의 아버지 결정이 무모했지만 오늘의 코리아나 그룹을 있게한 운명이 결정이 되었다.

 1962년 초 우리 가족은 부산을 떠나 서울 청파동으로 이사했다. 우리들은 곧바로 부근 효창국민학교에 편입되었고, 나와 용규는 집 근처에 있던 美8군 연예대행사 ‘화양’을 통해 ‘천재꼬마들이 탭댄서’로 美8군 무대에 서게됐다.

 ‘화양’의 음악담당 상무였던 베니킴에게 픽업되어 밤무대에 비공식적으로 데뷔하게 된것이다.

 그러던중 베니킴의 소개로 나는 ‘가이즈 앤드 돌스’의 멤버가 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가이즈 앤드 돌스’는 美8군무대 오디션에서 언제나 B나 C를 받는 하류그룹이었는데 내가 합류하면서 단숨에 A를 받는 그룹으로 격상되었다.

 美8군 오디션에서 받는 점수는 더블A가 최고의 점수였는데 ‘가이즈 앤드 돌스’가 이 점수를 받게 되는 웃지못할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동생 용규의 입단이었는데 내가 ‘가이즈 앤드 돌스’에 참가하고 3개월이 지나 다시 오디션을 받기 위해 연습을 할 때 용규는 굳이 나를 따라와 갖은 흉내를 내며 재롱을 피워 주위사람들을 웃기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들의 연습을 지휘하던 베니킴은 내옆에서 재롱을 떠는 용규를 보더니 “이녀석도 형 못지않게 물건이 되겠어”하며 동생도 함께 연습을 시켰던 것이다.

 꼬마 멤버 한 명이 추가된 ‘가이즈 앤드 돌스’는 며칠간의 연습을 끝내고 8군의 오디션에 나갔다. 우리들은 그날의 오디션에서 더블A라는 더이상 받을 수 없는 최고의 점수를 받았다.

 당시 ‘화양’에 30여개의 그룹이 있지만 더블A를 받은 단체는 金브라더스와 윤복희가 속한 A원쇼 둘 밖에 없었던 만큼 우리들은 최고의 능력을 갖춘 그룹으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가이즈 앤드 돌스’는 밴드 7명, 무용수 6명, 가수 2명으로 구성된 FULL SHOW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는데 당시의 밴드 마서트는 몇년전까지 MBC악단장을 역임했던 정서봉씨였다.

 그러나 8군무대에서 각광받기 시작한지 1년만에 우리에게 커다란 시련이 다가왔다.

 내가 공연중 무대에서 쓰러졌던 것이다.
 

 <정리 김순환 기자>  
 

 옮긴이 김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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